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커피러너 Nov 13. 2024

15년만에 찾아온 공황

커피대회 스탭 단기알바 3일차

10월 24일


7시 42분쯤 도착했다. 8시보다 너무 이른 시각. 오늘은 아예 맨 처음에 왔다. 

트럭을 끌고 인부(?)분들이 먼저 오셔서 스테이 설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에는 이 시간 미리 일을 하고 계셨었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자마자 딱히 할 일도 없고, 차라리 시간을 빠르게 보낼 방법으로 의자를 미리 옮기고 있었다. 가장 가볍게 옮기면서도 약간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티를 낼 수 있다고 할까. 다분히 계산적인 움직임이었다.


의자를 옮기던 중 갑자기 누군가 나의 팔뚝을 쳤다. 리더님이었다. 조용히 


"오늘 일찍 나오셨네요."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리더님이었다.

 "어제 대회에서 하신 것도 그렇고, 이번에 문제 내는 것도 궁금하실 텐데 추출팀으로 한번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찰나의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추출팀은 분명 고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지원자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나도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 추출은 아예 배제를 하지 않았던가. 첫날의 현기증도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대회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할 기회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대회의 문제가 어떤 식으로 출제되는지 궁금했다. 권유까지 했는데 기대에 굳이 배반할 필요도 없지. 그래서 수락을 했다. 


사람들은 어제보다는 일찍. 8시 출석체크 정시에 맞추어서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적당히 모였을 즈음에 리더님이 올라오셔서 출석체크를 하려고 준비를 했다. 


8시가 되자 스태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까만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리더님이 단상에 올라 출석 체크를 시작했다.


"여러분이 지난 이틀 동안 열심히 해주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몇 가지 피드백이 있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슈는 핸드폰 사용이었다. 참가자들로부터 불만이 제기되었다고 했다. 순간 첫날 피곤함을 달래려 핸드폰을 켰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목덜미가 화끈거렸다. 




출석체크를 끝내고 리더님이 따로 부르셨다. 업무가 바뀌었으니, 따로 설명이 필요해서 그렇다. 주방으로 들어가는 경로는 위치만 다를 뿐, 카페주방으로 넘어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나를 포함해 총 두명이 추출팀에 속했다. 안에는 두 명의 챔피언 출신 분들이 미리 추출을 하고 계셨다.


기계는 우리가 맥도날드에서 보던 브루잉 머신과 닮았다. 오늘의 커피를 만드는 그 기계다. 보통 배치브루머신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맥도날드 마크도 붙어있었다. 


주방안은 뺵뺵했다. 창문쪽에 쟁반을 다 놓지도 못해서 따로 박스 위에 올려놓아야 하는 쟁반도 있었다. 문제는 위로 길다란 보온 포트에 담겼다. 대충 1리터 정도 담을 수 있는 용량으로 추정한다. 문제의 양이 빽뺵하니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도 들었다. 


한 세트에 정답과 오답이 있는 포트가 각각 하나씩 비치되어 있었다. 그렇게 총 6세트가 비치되어 있었다. 다만 5번의 오답컵은 6번의 정답컵과 동일했다. 이렇게 하면 포트 하나를 줄일 수 있기는 했다. 공간이 협소하여 그런 선택을 했는지, 원래 문제 의도가 그러하였는지는 모르겠다. 커피를 담을 컵들은 위쪽에 총 4개의 쟁반에 올려져있었다. 정답컵은 따로 한 쟁반에 몰려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의 움직임은 마치 무용수의 동작처럼 정확해야 했다. 한 타임에 36잔 이상을 다뤄야 했고, 정답과 오답을 혼동해서는 안 됐다. 처음에는 실수도 있었다. 오답컵에 정답을 따르다가 무게로 눈치챈 적도 있었고, 정답 쟁반이 갑자기 바뀌어 당황한 적도 있었다.


문제 출제 방식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메모만으로는 쉽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마치 암호처럼 보이는 그 메모들은 해석이 쉽지 않았다. 애초에 선수로 나갈 생각이 없어서 문제 출제 방식이나 규칙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에 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쉬는 시간도 없는 거 아니에요라고 농을 쳤었다. "식시 시간 30분은 쉬게 해드릴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독려했다.  


일단 모든 쟁반을 전달하고 나면 잠시 쉴 수 있었다. 머신으로 추출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기 때문에 생기는 여유였다.  하지만 커튼을 열지 못하는 것은 전날과 같아서 소리만으로 상황을 판단해야했다. 이동안에 잠깐씩 리더님이 창문 틈을 잠시 젖히고 조용한 목소리로 문제를 출제하시는 챔피언 님들에게 이런저런 전달과 피드백도 하셨다. 


벽에 걸린 시계가 10시를 가리켰다. 첫 번째 휴식 시간. 주방 밖으로 나오자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미리 받아둔 점심 샌드위치를 꺼내 들었다.


주방 앞쪽에는 도우미들이 앉아 담소를 나눌 여유 공간이 있었다. 이번에 함께 일하게 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양한 알바 경위를 알게 되었다. 커피 업계 종사자, 대학생들, 그리고 알바몬 같은 사이트를 통해 들어온 분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30대 이상의 인원도 많았다. 내가 중간이 나이대라서 의외였다.


이번 대회 알바 중 공식 약골이 되어서 오늘 추출팀인데 괜찮으시냐고 묻는 분들도 있었다. 모두가 걱정해서 감사하기도 했지만, 부끄로운 감정도 동시에 들었다. 어떤 분은 너무 힘드시면 바꿔드릴게요 라고도 말씀해주셨다. 하지만 맡은 일은 책임감으로 끝까지 하고 싶었다. 내일은 바꿀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가 또 나를 툭툭 건드렸다. 옆으로 돌아보니 접수처에서 안내를 하시는 분이었다. 


"저 이번타임에 대타로 들어가는데 팁이 있을까요."


라고 물으셨다. 아마도 전날 내가 문제를 많이 맞힌 것을 보고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대회의 룰과 내가 생각한 팁들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운영진 중 한 분이 날 따갑게 쳐다보는 듯했고, 곧 리더님이 다가와 "대회 관련된 이야기는 조용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그제서야 목소리를 낮추며 급하게 대화를 끝냈다.


이런 주의까지 듣고, 이리저리 좁은 공간에서 문제가 담긴 컵들을 내렸다. 내리는 동안에 실수하지 않도록 신경을 쓰다보니 마음이 불안했다. 중간에 실수도 있었기도 하다. 바짝 긴장했던 것이다.




두 번째 휴식 시간, 20분이라는 짧은 여유가 주어졌다. 좁은 주방을 벗어나 복도 끝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조이면서 숨이 가빠졌다. 마치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괜찮아, 괜찮아..."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벽에 기대어 주저앉으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 끝, 희미하게 들리는 대회장의 소음이 오히려 나를 더 고립시키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소용돌이처럼 몰려왔다.


'첫날 핸드폰을 봤던 게 내 잘못이었을까?' '그래서 설거지로 보내진 걸까?' '다들 날 문제아로 보고 있진 않을까?' '이 공간이 자꾸 좁아지는 것 같아...' '숨을 못 쉬겠어...'


손바닥에 파고드는 손톱이 아플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시선이 흐려지고 귀에서는 이명이 울렸다. 방금 전 참가자와 나눈 대화가 자꾸 뇌리를 스쳤다. 운영진의 날카로운 시선, 리더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반복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첫날의 현기증은 단순히 체력의 한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두려움, 불안,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이성적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마치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처럼 반응했다. 


'실수하면 어떡하지?' '더 큰 문제가 생기면?' '이대로 쓰러지면...' '다른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숨이 찰 만한 격한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숨이 가빠지며 가슴이 조여왔다. 익숙한 증상이었다. 약 15년전 중고등학교 때 수없이 겪었던 그 공황의 순간들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불안감에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내 모습이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쉽게 멎지 않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나름 많이 나아졌다고, 이제는 사람들과 관계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알바 중에 불쑥 찾아오니 당황스러웠다.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불안이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20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언제 돌아가야 하는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깊은 숨을 내쉬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아무도 이런 내 모습을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써서 일어났다. 다리는 여전히 후들거렸고, 손은 떨렸지만, 어떻게든 태연한 척 화장실로 향했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하지만 여전히 가슴은 쿵쾅거렸고, 손은 떨렸다. 이대로는 주방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커피를 따르다 실수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다시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누군가는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주방에 들어서고 코끝으로 스치는 희미한 커피 향이 조금은 안정을 주는 것 같았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포트를 잡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시계는 어김없이 오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도 이겨내야만 했다.




다음 쉬는 시간에는 어떻게든 말을 걸려고 노력했다. 혼자 있기 보다는 아는 사람과 편안한 대화를 하면 조금 풀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원래는 2층에 모여 있는 대회 참가 지인들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지난번에 미리 인사를 나눴고, 오늘도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주방 아래쪽에 있어 서로 마주치지 못했다.


안내 데스크를 지나가다가 지난 쉬는 시간에 나에게 조언을 구했던 분을 다시 만났다. 마침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대화를 나누기 좋은 타이밍이라 생각했다.


알고 보니 그분은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 지난겨울 함께 커핑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고 하셨다. 커핑이 끝나면 항상 단체 사진을 찍었는데, 내가 자주 참여하다 보니 그분이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덕분에 가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먼저 알아보는 경우도 있었는데, 감사하면서도 특별한 업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 괜히 부끄럽기도 하다.


"다음 카페쇼 때 제가 있을 부스로 한번 들러주세요!" 

그분의 친근한 말씀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조금 전까지 거세게 몰아쳤던 공황이 잦아들고, 숨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미자믹 세 타임에는 실수 없이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내일이면 마지막 근무일. 그동안 서툴렀던 내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아려왔다. 클레임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다른 분들의 따뜻한 격려가 있었다. 이번처럼 새롭게 알게 된 분도 생기고 말이야. 커로 이어진 소소한 인연이 마음을 포근하게 감쌌다.


'내일은 꼭 실수 없이 해내고 싶은데...'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클레임이 있었더라도 이미 알고 있으니 다시 하지 않으면 될 일이고, 지금은 행복한 순간들만 기억하자. 커피 향 가득한 공간에서, 손님들의 감사 인사와 동료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던 그 순간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경험이 내게 남긴 작은 추억들이 새삼 귀하게 느껴졌다.


퇴근길, 창밖으로 비치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내일을 위한 작은 용기를 가슴에 담았다.


이전 11화 단기알바 2일차, 오늘의 (비공식) 2등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