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스탭 2일차, 대회 선수 빈자리 채우며
2024.10.23
아침이 밝았다. 전날과 같은 시간에 출발했지만, 전날 출석체크를 8시 정시에 하지 않아서인지 조금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어제 내가 겪은 어지러움은 특히 어두운 환경에서 심해지는 것 같았다. 전날 저녁, 엄마가 옷을 정리하러 들어오면서 방 불을 켰을 때 눈이 한결 편안해지고 두통도 감소했다. 평소에는 늘 불을 끄고 지냈지만, 어제와 오늘 아침까지는 계속 불을 켜두었다. 또한 눈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 대회 장소인 '연남장'에 들어갈 때마다 휴대폰의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을 최대로 설정했다.
전날 세팅했던 무대 테이블들을 치우고 대회 스테이션을 올려놓는 작업을 해야했다. 알바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불편함이었다. 가벼운 것부터 무거운 순서대로 치우는데, 의자를 들고 있을 즈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의자 드실 수 있겠어요?"
말투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표정을 보니 비아냥이라기보다는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내 몸 상태가 그렇게 약해 보였다는 게 괜히 자존심 상했다. 인정한다. 내 심사가 비틀렸다는 것을. 그만큼 다른 사람들 눈에도 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나 보다.
"어제보단 괜찮아져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넘어갔다. 잠시 후 다른 분이 다가왔다.
"추노 하실 줄 알았어요."
'추노'는 2010년 방영된 동명의 드라마 이전까지는 대중적이지 않은 단어였다. 하지만 드라마 방영 이후 '도망치다'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게 되었는데, 이는 단어의 본래 뜻과 정반대로 사용되는 특이한 경우다. 여기서도 후자의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루 쉬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두통은 몇 주째 지속되었고, 지난주에는 자다가 심하게 코피도 쏟았었다. 게다가 타임키퍼를 하게 되면 어두운 환경은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걱정이 앞섰다. 어제는 비교적 한산했지만, 오늘부터는 두 타임 이상 늘어난다. 대회 선수 스케줄표도 이미 나와 있었고, 다른 날들도 오늘만큼 바쁠 터였다.
출석체크와 업무 배정은 무대 세팅을 마친 후에 진행되었다. 나는 타임키퍼가 아닌 백룸 담당이었다. 처음에는 업무가 4일 내내 고정인 줄 알았는데,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는 모양이었다. 대회는 5일이지만 3일이나 4일만 참여하는 인원도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전날 보이던 분들이 없어지고, 새로운 얼굴들도 보였다.
백룸은 이전 카페 주방을 사용했다. 처음 맡는 업무라 운영진 리더께서 따로 설명을 해주셨다. 건물 뒤편에 주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었다.
주방으로 들어서며 빠르게 계산해보았다. 한 테이블당 커피 컵 18개와 남은 커피를 담는 양동이 하나, 즉 19개의 그릇을 씻어야 한다. 한 타임에 6테이블, 오늘은 총 9타임이니 19*6*9=1026. 천 개가 넘는 그릇을 시간 맞춰 설거지해야 한다니,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식기세척기가 한 대 있었다. 전에 카페 알바할 때도 있었던 기계였다. 정확한 기종은 모르지만 예전에 복지관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고, 사용법도 간단했다.
주된 업무는 두 가지였다. 정답 컵에 붙어있는 스티커를 떼어내고,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는 것이었다. 스티커는 점성이 강해 쉽게 떼어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쓰는 스티커도 다양했는데, 하얀 테이프를 쓰기도 하고 작은 컬러 원형 스티커를 쓰기도 했다.
설거지는 기계가 알아서 해주니 넣기만 하면 되었다. 함께 일하시는 분은 전날부터 하셔서 능숙했다. 내가 스티커를 떼고 그릇을 넣으면 그분이 정리를 하고, 양동이에 남은 커피를 비우고 세척하는 일도 맡아 하셨다.
또 주방에서 이물질들을 체크해야하다보니 무대보다는 확실히 노란 조명이 밝게 빛났다. 지금 몸상태에 타임키퍼보다 일을 하기 훨씬 편안한 환경이었다. 이런 몸상태를 운영진에서 알지는 못하니 의도한 배려는 아니었겠지만, 다행이었다. 오늘은 좀 편안히 일을 하겠구나.
한 타임이 지날 무렵, 갑자기 무대와 카페를 잇는 창문 커튼이 열리며 리더님이 나타나셨다.
"오늘도 노쇼가 있네요. 혹시 지금 대회 한 번 참여해보실 분 있나요?"
물론 대회에 정식 참여는 아니고, 이미 나온 커피를 그냥 버리기는 아까우니 스탭들에게 경험으로 제공해주는 기회였다. 나는 당연히 대회에 관심이 있었기에 참가 의사를 밝혔다. 옆에 계시던 분도 뜻밖에 참가하고 싶다고 하셨다. 커피 용어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단순 알바로만 오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러면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죠."
순간 긴장되었다. 운명을 건 가위바위보, 하나 둘 셋. 나는 찌를 냈고 상대는 묵이었다. 아쉬운 패배였지만, 리더님께서는 "오늘은 각 타임마다 노쇼가 있을 수 있어요. 나중에 기회가 있을 거예요."라며 위로해주셨다.
커튼 너머가 궁금했지만, 경기 중에는 선수들에게 방해될 수 있다며 되도록 커튼을 걷지 말라고 하셨다.
한 타임을 기다렸다. 나도 언젠가는 참가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틀째 나왔으니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설거지가 다시 밀려들어왔다. 두 번째라 조금은 손에 익었다. 일하는 중에 아까 대회에 나가신 분이 돌아오셨다.
"대회는 어떠셨어요?"
"어유, 긴장되네요. 두 개밖에 못 맞췄어요."
사실 두 개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이번 대회는 역대급으로 어렵다는 평가가 자자했다. 1일차에는 만점자가 없었고, 6문제 중 5개를 맞힌 사람도 42명 중 두 명뿐이었다. 챔피언 출신 중에도 한 개만 맞춘 분이 여럿 있기도 했다.
일하는 중에 리더님이 다시 커튼을 열으셨다.
"이번에도 노쇼가 있네요. 한 번 참여해보세요."
'드디어 기회가 왔구나'
알바를 시작하기 전에는 땜빵으로라도 대회 선수로서 참여할거란 상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연습하려면 생두라던가 물을 경험해보아야 했겠지만, 도와줄 사람도 없고 금전적 여유도 없는 나로서는 아직 시기상조인 일이었다. 그러니 아직 제대로 대회 연습을 해본 적은 없다.
대회에 참가하기로 했다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과거에는 '경험삼아'라는 안일한 태도로 시험을 봤다가 실패했던 적이 여러번 있다. 그런 경험은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비록 땜빵이지만 진지한 선수의 마음가짐으로 임하기로 했다.
무대로 향하며 즉흥적으로 전략을 세웠다. 선수들의 대화와 지난 결과들을 돌아봐도, 난이도가 높기로 악명 높은 대회였다. 세계대회에 나선 선수들도 그런 말을 했다. 선수들도 쉽게 맞추지 못했고, 솔직히 내가 구별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전날 대회 결과를 보니 같은 개수를 맞춘 사람들은 더 빠르게 한 사람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겼다. 내가 단 하나라도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는 하나를 더 맞추려고 고심하기보다는 되도록 한 번에 끝내는 편이 나아보였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거지. 사실 대회에 나가서 경험 이외의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 기댈 필요가 없기는 했지만.
무대로 가는 길에 선수로 참여하는 건 아님에도 긴장이 밀려왔다. 예전 게임 대회 때는 손 떨림이 심하고 혼잣말이 많아 경고를 받기도 했었다. 그 게임은 계산이 많아 혼잣말하는 선수가 많았지만, 떨림으로 경고를 받은 건 나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이 되는건
일단 식수대를 통해서 물을 체크했다. 물은 날씨에 따라 바뀌므로 체크를 해야 경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근데 사실 연습을 하지도 않았고 룰도 잘 모르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별 의미는 없었다.
무대에 올랐다. 나는 3번 테이블이었다. 무대에 올라서니 의외로 긴장은 거의 사라졌다. 그냥 즐거웠다. 이렇게 내가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게 재밌었다.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역시 이래야지.'
혼자서 약간 과장된 세레머니도 했다. 주로 하는 세레머니는 예전 브라질 축구선수 카카의 하늘을 찌르는 골 세레머니였다. 가슴을 두드리면서 있지도 않은 남성성을 과시하는 포즈도 자주 취곤 했다.
사회자의 카운트다운
"하나, 둘, 셋 시작하겠습니다."
커핑용 숟가락을 쥔 손이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 즐기고는 있지만 한편으론 긴장 역시 하고 있구나.
한 컵씩 빠르게 마시고 뱉었다. 어떤 컵들은 의외로 쉽게 구분이 갔다. 바로 정답을 제출했다. 그러나 반대로 구별이 잘 되지 않는 컵도 있었다. 특히 4번과 6번이 그랬다. 이 두 컵은 좀 더 신중하게 마셨다.
"정답을 체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정답으로 제출한 컵을 들어올려 타임키퍼가 정답을 볼 수 있도록 확인시켰다.
첫 번째 컵의 정답을 확인할 때 눈을 질끈 감았다.
1번(테이블) O, 2번 X
...
3번 O
휴. 살았다. 0개는 아니구나.
다음 컵은 틀렸다. 별로 고민은 하지 않았는데 아쉬웠다. 1번 컵에서의 결과는 운이었던걸까. 그래도 한 개는 맞았으니
세 번째 컵은 정답이었다. 그래도 두 개 맞았구나. 그분이랑 같은 점수네. 부끄럽진 않겠다.
그리고 대망의 4번 컵 차례가 왔다. 오래 고민했던 만큼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1번 X, 2번 X,
...
3번 O
정답이었다! 세 개나 맞았구나. 후, 반은 맞았네
5번은 정답이었다. 네 개!
6번 컵을 들어올리기 전, 잠시 망설였다. 4번만큼이나 오래 고민했던 커피였는데... 결과는 아쉽게 오답이었다. 그래도 4개나 맞췄으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대회 기록을 서명하면서 나의 시간 기록을 보았다. 2분 47초였다. 총 대회 시간이 6분이었다. 전날에 2분 대로 마친 사람은 없었기에 아마도 내가 대회 끝날 때까지 제일 빠르게 끝낸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예측을 했다.
일하면서 쉬는 중간중간, 전날 랭킹표와 그날의 상황을 보면서 나의 순위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내가 대회에 참여한 2일차가 다른 날에 비해서 성적이 안 좋았다. 9타임 중에 5개를 맞춘 분은 고작 한 명뿐이었다. 만점자는 당연히 없었고 4개를 맞춘 테이블이 없는 타임도 있었다.
그리고 저녁에 뜬 결과를 보았다. 한 번씩 마신 나보다 더 빨리 한 사람은 없었다. 역시나 본 대로 5개를 맞춘 분도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니 오늘의 (비공식) 2등인 셈이다. 정식으로 대회에 참가했다면 본선에 올라갔을 성적이었다.
연습이 없었으므로 어디까지나 운에 기반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지난 겨울부터 거의 매주 커핑 한 경험이 도움은 되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대회에 나섰지만, 긴장보다는 무대 위의 긴장감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평소의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자신감이었다. 비록 이번에는 특별히 준비한 건 없었지만, 그만큼 무대를 온전히 느끼고 몰입하게 된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이런 무대에 서기 위해 더 철저하게 준비를 했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무대와 기회가 나에게 주어질지 아직은 모르겠다. 인생이란 늘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작년 이맘때의 나에게 "너는 커피 대회를 경험할 거야"라고 말했더라면, 분명 ‘이게 무슨 소리야’라며 웃어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대회 테이블블에서 느낀 설렘과 즐거움이 앞으로의 가능성을 더 기대하게 만든다.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가올 기회를 더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매일 스스로를 정진하고 단련하는 일뿐이다. 다음 무대가 주어졌을 때,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설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