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남과 연희 부근은 자주 퍼블릭 커핑을 하러 갔던 곳이다. 이번에 가는 장소는 평소 가던 카페와는 다른 장소이지만 교통편은 동일하기에 이질감은 전혀 없었다.
지난 단기 알바를 할 때 오전에 항상 연남-연희를 진입하는 고가도로에서 항상 막혔다. 당시에는 뉴스에도 나왔던 ‘싱크홀 사건’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오전 시간에 이 구간은 정체가 되었다. 집에서 고가도로까지 걸리는 시간이 25분이라면 고가도로에서 한 정거장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하는데 10분 가까이 소요되었다.
버스를 내리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간 다음 막다른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진 뒤 수 분 직진하면 알바 장소가 들어왔다. 가는데 4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알바를 하는 장소는 연남장이라는 곳이다. 홈페이지에 소개에 따르면 연남장의 뜻은 이렇다.
연남장(場)은 지역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로컬 크리에이터 라운지입니다. 지역별 창작자의 다양한 콘텐츠를 한데 모아 소개하여 상생의 가치를 담아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동네와 소통하는 연결의 '장'을 지향합니다.
1층에 주방이 둘 있었다. 입구에서 멀리 보이는 주방은 커피와 음료를 제조하는 공간이었고 입구에서 가까운 주방은 요리를 하는 공간이다.(이하 카페와 레스토랑) 2층에도 간단히 자리가 있었다. 위에는 노란 불빛을 띤 샹들리에가 여럿 걸려있었고,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파티 장소처럼 느껴졌다.
2층에서 8시까지 출석체크를 할 예정이었으나, 8시 14분에 첫 출석체크를 하였다. 이날 직책의 배정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나는 ‘타임키퍼’로 되어 있었다.
출첵과 배정이 끝난 후 1층으로 내려와 ‘타임키퍼’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일단 각각 스톱워치를 둘 나눠주었고 하루 동안 작성할 기록지가 있었다. 스톱워치는 혹시나 실수할 가능성을 대비해 시작사인이 들어서면 두 개의 스톱워치를 동시에 누르라고 하였다.
두 개의 타임워치를 동시에 눌러 시간을 기록해야 했기에, 손이 미묘하게 어긋날까 걱정이 되었다. 준비물을 받고 다른 스태프들과 미리 모여 짧게 연습을 시작했다. '하나, 둘.' 두 타임워치를 동시에 누르는 순간, 시간이 크게 차이 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다행히 1초 이상 차이가 나지는 않아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실전에 들어가면 연습처럼만 하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기록지 각 장은 모두 동일한 양식으로 각각의 컵마다 O, X로 정답여부를 적도록 되어 있었다 걸린 시간도 랭크에 들어가므로 꼭 작성해야 했고, 총점이 몇 점인지 그리고 마지막에 해당 선수의 사인을 받도록 하였다. 선수와 사회자에게 정답을 보여줄 OX팻말도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시간을 재고, 점수와 시간을 기록하는 것이 타임키퍼 업무의 전부는 아니었다. 각각의 경기 시작 전후로 세팅을 겸했다. 레스토랑에서 추출을 하면 구석에서 타임키퍼를 보조하는 분들이 카트에 선수가 맛을 볼 커피 총 6세트를 쟁반 두 판에 각 3세트씩 담아준다. 커피가 담긴 카트를 끌고 담당하는 테이블로 가져가서 컴을 깔아 둔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레스토랑 쪽에 비치된 알코올 스프레이와 행주로 테이블을 한 번 닦아주었다.
경기 중에는 사회자의 시작 사인에 맞추어서 시간을 잰다. 선수가 끝났다는 사인을 주면 시계를 멈추고 기록을 하면 된다. 정답체크는 경기가 한 타임 종료되면 사회자의 진행에 맞추어서 확인을 한다. 선수가 정답을 맞히면 O 틀리면 X 팻말을 든다.
오늘은 각 타임 선수 6명씩 총 7타임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3타임을 최대한 빠르게 이어서 진행한다. 그래도 한 타임이 끝나면 그릇을 치우고 다시 올리는 시간이 필요하니 대략 20~30분은 소요된다. 세 타임이 지나고 따로 추출을 위한 준비시간(브루잉 타임) 30~40분을 가진 뒤 오늘은 마지막 네 타임을 하고 마무리되는 일정이었다.
대회 참가비는 11만 원으로, 게임 대회와 달리 커피 대회는 상금이 적고 참가비가 있는 것이 신기했다. 쉬는 시간에 다른 팀원과 대충 계산해 보니, 참가비로만 천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 모일 것으로 보였다. 홍보 효과도 있지만, 운영상의 로스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쇼 참가자가 종종 있었다. 첫 타임부터 한 명이 오지 않아 빈자리가 생겼고, 덕분에 첫 타임에서는 업무 파악을 위해 다른 분들의 모습을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처음이라 긴장됐지만,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며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었다.
세 번째로 들어오신 분은 커핑에서 종종 뵌 적 있는 분이라 반가웠다. 파나마 산지도 갔다 온 경험도 있으셔서인지 파나마의 유명 농장인 에스메랄다 모자를 쓰고 오신 부분이 인상 깊었다. 알아봐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무리 속에 서서히 스며들어 일하는 법을 익힐 무렵, 예상치 못한 피로가 몰려왔다. 정확한 시각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12시 즈음부터였다. 첫 타임 때도 살짝 머리가 무겁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별일 아니겠지 하고 넘겼다. 요즘 들어 가끔씩 오는 증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점점 현기증이 심해졌다. 잠시라도 시선을 돌리려고 핸드폰을 들여다봤지만, 오히려 머리와 눈의 통증이 악화될 뿐이었다. 너무 피곤해서일까? 몸 상태가 이렇게 안 좋을 줄이야.
혹시 밀폐된 공간이라서 그런가 싶어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멀쩡해 보였다. 지금 와서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었다. 전체 스태프는 빠듯하게 매칭되어 있었다. 서로의 업무를 교대는 가능해도 대체를 할 수는 없었다. 다른 업무라고 더 쉬워 보이지는 않았기에 그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무겁고 현기증이 심해졌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활기찼지만, 혼자만 지쳐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약한 걸까?
첫 타임처럼 노쇼자가 있었으면 했지만, 이후의 시간에 내 자리에 노쇼자는 없었다. 다행히 오늘은 일정이 짧아 금방 끝날 거니 금방 갈 수 있을 거라고 위안을 삼았다. 그리고 1시 반쯤 되어서 모든 경기가 끝이 났다.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해산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무대를 정리해야 했다. 주최사 인스타그램에서 이미 세팅된 무대 사진을 봤기에 그대로 유지될 줄 알았지만, 밤에 공연이 있어서 공간을 비워야 한다고 한다. 대회 스태프들은 목장갑을 끼고, 경기에 사용한 6개의 스테이션을 롤러에 올려 인부들이 트럭으로 옮길 수 있게 정리했다. 전시용 그라인더와 워터 스테이션도 옮겼다. 전시용 그라인더는 완전 쇳덩이여서 스태프는 쉽사리 들지 못하고 인부가 담당해서 옮기셨다. 이어서 원래 매장에서 쓰던 테이블과 의자를 원위치로 옮겨야 했다. 의자는 비교적 가벼웠지만, 테이블은 두꺼운 소재로 묵직했다. 다행히 밀기만 하면 됐지만 남자 둘이 힘을 줘야 겨우 움직일 정도였다.
결국 나는 일을 하던 중간에 테이블과 의자에 주저앉았다. 반쯤 쓰러진 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은 당장이라도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외치지만, 이 이상 억지로 하다간 어딘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내일도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은 그저 가만히 숨을 고르는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4일간의 일정을 포함해 주말 편의점 알바까지 해야 하니. 이 이상 무리해서 일을 못하게 되는 건 더 큰 문제라 생각했다.
다행히도 일은 한 시간도 안돼서 끝났다. 의자에 쓰러져 있는 나를 보면서 안쓰러웠는지, 남자분이 간식을 남겨주고 가셨다. 남을 의심하고 꼬인 심사 덕분인지, 약간 짬처리 인가 싶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주는 걸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고 그걸 거절하려고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받았다.
집까지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원래는 근처에서 워크인으로 커핑까지 하려고 했었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커피를 마실 여력도 없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출근할 떄는성큼성큼 걸었는데 퇴근하는 지금은 간신히 한 발짝씩 내밀고 있다. 버스를 탈 수는 있을까. 경미한 차멀미도 있어서 괜히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고, 바로 침대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