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뿐인 63년생 친구에게
내가 아는 영미 씨는 참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강아지에게 꼬리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하고, 과일 서리를 하다가 밭 주인이 ”이놈 자식들 멈춰!“ 라고 하면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그 자리에 꼼짝도 못하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시험마다 백점을 맞는 똑똑이였지만 심장은 콩알만했다.
스물다섯 살의 영미 씨는 이렇게 어리고 키도 작은 남자와 사랑을 하면 아기가 안 생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준비 없이 새 생명이 찾아왔다. 결혼식은 따로 하지 못했다. 대신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서로에게 맞절을 했다. 공부를 참 잘해서 공주사대 한문교육과를 입학했지만 갑작스럽게 ‘엄마’로서의 인생을 살게 된 영미 씨는 20년이 훨씬 지나 방송통신대학에서 졸업을 했다.
그저 ‘발 한 쪽만 담그고 사는 거야’ 라는 생각으로 살았다는 영미 씨는 12년이 지나 이제 정말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둘째를 가졌다. 둘째는 자궁의 혹과 무럭무럭 자랐고 다행히 커다란 혹과 함께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자궁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매일 같이 호르몬 약을 챙겨 먹어야 했는데, 오히려 약을 먹는 게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났다는 걸 매번 확인하는 절차 같아 복용을 중단했다.
남편이 집을 나간 후부터는 촛불 같은 인생을 살았다. 삼시세끼 라면을 끓여 먹었다. 매년 고장난 보일러가 뱉어내는 찬물보다 딸내미의 짜증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인생이 절망적이었다. 다 버리고 떠나고도 싶었지만 그 마저도 잘 안 됐다. 영미 씨는 그 캄캄한 방에서 위태로운 불씨를 꺼트리는 대신 활활 살리기로 결심했다. 조무사 자격증을 따고 병원에 취직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궂은 일은 처음이었다. 안간힘을 써 가며 3교대를 버텼다. 불안감 때문에 잠에 깊이 들 수가 없었다. 몇 해 사이에 부쩍 늙고 많이 지쳤지만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척 씩씩하게 일했다. 영미 씨의 희생과 헌신으로 집이 조금 더 환해졌다. 이사를 가고 보일러는 더이상 고장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고 영미 씨는 남편이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친정 근처에 아파트를 샀다. 사실 집을 옮기고 나서야 그 순간까지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영미 씨는 언제나 '고도'를 기다렸지만, '고도'는 끝내 오지 않았다. 가끔 딸을 통해 소식을 들어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 세식구는 세식구끼리 안정을 찾았다.
워낙 요령이 없고 착해빠진 성격이었던 영미 씨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반납했다. 3교대를 하면서도 오프 날에는 무조건 엄마 집에 가서 반찬을 하고 5시간씩 화투를 쳐 드렸다. 아버지가 투석을 하거나 진료가 필요한 날이면 보호자 자격으로 병원에 가는 것도 영미 씨의 몫이었다. 몸이 많이 굳은 아버지를 낑낑 끌고 기어이 엄마와 면회를 시켰다. 6남매 중 그 누구도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올해는 보내드려야지, 올해까지만 하고 요양병원 입원 시킬 거야. 말 뿐이었다. 마음 약한 영미 씨는 결국 갑상선에 이상이 와서 병원에서 두 달치 약을 타왔다.
하지만 반대로 가진 것도 많았다. 딸은 다정하고 아들은 건강하게 컸다. 어느 병원에서 일을 하든 환자들이 영미 씨를 참 좋아했다. 조금 작고 오래됐을지는 몰라도 지지고 볶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아파트도 있었다. 서로 부모님 모시는 건 귀찮아 할지 몰라도 적어도 형제끼리 헐뜯거나 사기 치는 일도 없었다. 몸은 많이 축났지만 무난하고 무탈한 인생이었다.
딸의 스물 둘 생일에 나쁜 마음을 먹었던 영미 씨는 11년이 지나 딸의 서른 세 번째 생일에 “너를 낳은 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야.” 라고 말했다. 영미 씨는 소녀 같고 순수하지만, 역경을 극복해 내는 강함이 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스물 다섯의 영미 씨에게 건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꼭 말해주고 싶다. 나를 낳아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그동안 아주 많이 수고했다고.
사랑해. 영미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