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의 기적
나를 위해 노력해 왔던 여름날들..
결혼 후 우리 가족의 여름휴가지는 매년 강원도 친정집이다. 찜통더위에 꿉꿉한 날씨의 연속에도 그곳은 선풍기만으로도 버틸 만큼 시원한 청정지역이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곳으로 향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다 만나는 꿀맛 같은 휴가인데 가고 싶은 곳이 꼭 그곳뿐이겠는가. 가고 싶은 곳이 많을 텐데도 매년 여름휴가 때 한 번도 친정집 가는 일을 거른 적이 없는 남편에게 새삼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여름휴가철이 농사가 한창인 때이기도 해서 친정에 가면 늘 하는 일이 고추 작업을 돕는 일이다. 그나마의 도움이 없으면 새벽까지 두 분이서 잠도 못 주무시고 고추 작업을 하시기 때문에 늘 저녁엔 낮에 따다 놓은 고추가 한껏 펼쳐진 비닐하우스로 향한다. 맥주도 한잔하면서 과일도 깎아먹고 함께 하는 일은 덜 지루하다. 비닐하우스에서 일할 때 들으시라고 오디오도 사드렸는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노랫소리가 제법 일하는 시간을 외롭지 않게 해 준다며 엄마가 좋아하셨다.
일하던 사람이 쉬라고 있는 게 휴가라 사실 나는 친정에 가면 남편에게 아이들을 담당하게 하고 일은 되도록 시키지 않으려 한다. 밭일을 해야 할 때는 그래서 늘 내가 나섰다. 매년 그곳으로 함께 향해주는 것만으로도 사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생각하면 당연한 거다.
남편의 황금 같은 휴가 기간을 이렇게 친정에서 보내도 괜찮냐 물으면 남편은 늘 이렇게 대답한다. 시원하고 얼마나 좋냐며, 쓸데없이 돌아다니면 덥기만 하고 돈만 더 쓴다고, 그 돈으로 함께 맛있는 것도 먹고 농사일도 도와드리자고, 이럴 때 시간 같이 보내는 거라고 말이다.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생각이 맞지 않으면 아마 이 또한 싸움의 이유가 됐을 텐데 늘 너그럽게 친정으로 향해주는 남편 덕분에 지금처럼 내 마음이 치유됐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원래 친정에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혼 전을 생각해 봐도 그렇게 꼬박꼬박 찾아가지 않았고, 대학교 때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방학 때는 집보다 숙식을 제공하는 알바를 선택했던 게 나였다.
내가 친정이 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지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편하지 않았던 집에 대한 기억들 때문인지, 여전히 그곳이 나에게 편하지 않은 곳이라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친정에 가는 게 반갑지 않았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실 남들은 그립고, 못 가서 안달인 그곳이 나에겐 그러하지 못해 가끔 서글프기도 했다. 친정집을 떠올리면 함께 올라오는 복잡한 감정들이 여전히 정리되지 않아 나는 그곳을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의 집. 그곳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로든 자리 잡지 못하니 그 공허한 마음이 뿌리 없는 나무처럼 나를 공중에 둥둥 떠다니게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결혼을 하고 내 가정이 생기면 그래도 안정감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내 마음은 더 강하게 그곳에서의 안정감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몸은 독립되어 있으나 여전히 내 마음은 어릴 적 그 어딘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실 여름휴가 때마다 친정을 가자고 했던 건 남편의 생각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나 또한 그 생각에 동의했던 건 내 마음이 이젠 편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였기도 하다.
형편 때문이었을지 각자의 미성숙함 때문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늘 불안하고 공허했던 나의 집이 이젠 편안하게 나에게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혼 후 더 커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 허물어져가는 집에 대한 기억을 다시 하나하나 세워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안 좋은 기억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싶진 않지만 어찌 됐든 좋은 기억을 더 많이 만들어 나에게 그곳을 행복한 기억이 많은 곳으로 다시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아직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함께해 주는 남편이 있기에 나에겐 기회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매년 여름휴가뿐만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친정을 가려고 노력했다.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만큼 서로를 잘 알게 되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먼저 그리 할 수 없다면 이제 같은 부모가 된 내가 먼저 용기 내봐야겠다 결심했었다.
좋아서가 아닌 좋아지고 싶어서 매년 찾아간 친정이었다.
그렇게라도 둥둥 떠있는 그곳에서의 내 존재를 이젠 바닥으로 내려 쉬게 해주고 싶었고, 아프게 자리 잡은 지난 기억들을 좋은 기억으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내 안에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기회가 있을 때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그곳으로 발길을 향할 때마다 나는 신기하게도 매번 다른 것들을 깨닫고 돌아왔다. 어릴 때 부렸어야 할 투정과 심통, 하소연 같은 것들을 다 큰 어른이 되어 부려보고 나서야 나는 서서히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부모님도 그제야 나를 자식으로 바라봐 주시는 것 같았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몸만 크고 마음은 자라지 못하는 일종의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나이대에 누려야 할 가벼움을 이미 묵직한 무언가에 눌려 누리지 못하는 가엾은 병이다. 그 아픈 아이를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는 마음은 무겁고 외롭다. 그래서 가벼워지고 싶어 나는 노력했던 거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성장이 멈춰있는 나를 다시 키우고 싶었다.
내가 내 아이들을 키워낸 것처럼 그렇게 내 안의 아이도 키워왔던 것 같다. 그렇게 서서히 내 나이에 맞는 어른이 되어가고 싶었다. 지금은 몇 살쯤 컸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러한 노력들을 하기 이전보다는 많이 성장한 느낌이 든다.
나에게 여름휴가는 그랬다.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도리를 다하려는 명목을 앞세워 정작 나를 키우려고 그곳으로 향했던 것 같다. 혼자였다면 아마 여전히 포기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남편이 있었고 아이들이 함께해 주었기에 그 시간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이젠 나에게도 친정은 편안한 곳이다. 부모님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이젠 원망이 아닌 감사함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평범한 30대 후반의 감정이 되었다. 내가 더 해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어쩌면 내가 품었던 원망의 감정은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나의 무능력함에 대한 수치심의 또 다른 감정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나의 모든 감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내 주변 사람들 중 누구 하나 억울하지 않게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매년 여름 친정으로 향했던 그 시간들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혼자였다면 더 오래 걸렸을지 모르겠다. 내가 그 시간들을 가질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고, 묵묵히 기다려 준 남편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처럼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공허하게 남은 나의 어떤 날들이 내 안에 그대로 있는 이들에게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주하면 힘든 감정들이 벅차 외면하고 있는 상황들이 있다면 스스로를 위해 조금은 용기 내보라고 응원해주고 싶다.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고 어쩌면 기회는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닌 나의 평안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