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loriaMJ Nov 06. 2017

6월의 어느 토요일

25주 그리고 1일, 너를 만나다 

기억한다. 막 초여름이 시작되던 그날의 공기를. 거실로 쏟아지던 오전의 햇빛은 눈이 부셨고 그 속에서 땡이(강아지)는 졸고 있었고 꽁이와 망고(고양이) 털 몇 가닥이 햇빛을 받아 둥둥 떠다녔다. 

그런 평화롭고 여느 때와 똑같은 토요일이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근데 그러지 못했다. 임신 24주 5일. 


임신한 몸은 갈 수록 조금씩 무거워져서 월요일부터 금요일 주5일 근무를 하고나면 아무리 게으르게 살아도 토요일 아침엔 나른해지고 피곤했다. 그날도 그런 '평범한' 임산부의 토요일 아침이라 믿었다. 그런데 울컥.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하혈을 하고 말았다. 세수도 하지 못한 채로 부랴부랴 옷만 입고 엄마와 병원엘 갔다. 가면서도 별일 아닐거야, 별일 아니어야 돼, 수도 없이 되뇌며 다니던 산부인과에 갔다. 정밀 초음파 검사를 1주일 앞두고 있던 때였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일단 수액을 달고 진통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그렇게 초조한 몇 분이 흘렀을까. '여기서는 안 될 것 같아요.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셔서 입원을 좀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진통이 잡히지 않고 있고, 그래서 출혈이 조금씩 계속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진을 하고서는 양수 냄새가 난다고도 했다. 그 상황이 어떤 의미이고, 얼마나 급박한지 그 때는 몰랐다. 


부랴부랴 소견서를 들고 근처 한양대학교 병원에 갔다. 응급실을 거쳐 막 출산이 임박한 산모들이 대기하는 분만실에 입원했다. 커튼으로 나뉘어진 병상. 나중에 알았지만 그 때 내 양 옆엔 이미 나처럼 조기진통으로 입원한 산모들이 이미 와 있었다. 나처럼 아직 산달이 한참 남아서 조기진통이 온 경우는 무조건 침대에 누워서 라보파라는 약을 맞는다. 소변도 누워서 소변통에 보고, 밥 먹을 때를 빼놓고는 왼쪽으로 돌아 누워서 진통이 잡히기만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라보파를 한 사이클 맞고 고혈압 치료제로 쓰이는 먹는 약을 먹고도 진통은 잡히지 않았다. 진통 검사 상에서 내 자궁은 이유를 알지 못한 수축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상황이 답답했을 뿐 아무렇지 않았다. 


3일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이틀째, 내 옆자리 산모 - 나중에야 그녀가 조기진통이 온 뒤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키우기 위해 4주를 버텼다는 것을 알았다 -가 더 이상 진통을 억제하지 못하고 출산을 하러 갔다. 산부인과 선생님들이 그녀에게, 아니 그녀의 아이에게 폐성숙주사라는 스테로이드 약물을 주사했다. 그녀의 남편은 그 주사가 좋은 거면 최대한 많이 놔 달라고 하소연했다. 역시 나중에 알았지만 조산을 할 때 하더라도 이 주사를 맞느냐 맞지 않느냐, 몇대를 맞느냐는 후에 미숙아의 예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렇게 옆 자리 산모가 아이를 낳으러 간 사이 나는 보험이 되지 않아 비싼 트랙토실로 주사약을 바꾸고 4일 째 버티고 있었다. 낑낑 대며 일어나 앉아 점심을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상을 물렸다. 그리고 소변을 누려고 침대위에서 자세를 잡는데 무언가 또 울컥 흘렀다. 출혈이 걷잡을 수 없어져버렸다. 흘러나오는 피와 함께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의사 선생님은 양수가 터졌다고 했고, 교수님이 오시더니 응급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치태반이어서 제왕절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부터 산통이 시작됐다. 


수술 설명을 듣고, 제모를 받고, 폐성숙주사를 한 대 맞았다. 그런데 점심밥을 먹은게 문제였다. 위에 음식물이 남은 상태로 마취를 할 경우 기도가 막혀 최악의 경우 수술 중에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항생제를 맞으며 최대한 버티고 버티다 3시반쯤 수술장에 가기로 했다. 배가 너무 아파서 무릎을 세우고 있었는데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우리 아기 살 수 있을까?"  "아기는 또 가지면 된다" 6층 분만실에서 수술장이 있는 5층으로 가는 동안 엄마가 한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수술장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침대에 누워 거기 있던 몇 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시간이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기다릴 것 같았다. 


6월 20일 15시 59분. 

태명이 호두였던 우리 아들을 만났다. 770그람. 감히 이전에는 생각조차 해 본적 없는 아기의 몸무게였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10월 2일, 길고 긴 추석연휴에 세상 빛을 보아야 했던 아이를 막 임신 7개월로 접어들던 때, 정확하게는 25주 1일에 만났다. 

안아보지도 못했고, 울었는지 울지 못했는지도 듣지 못했고, 고맙다고 엄마에게 와줘서 감사하다는 말도 해주지 못한채. 


"엄마, 아기는 괜찮아?"

회복실에서 나오자마자 엄마에게 물었고, 엄마는 괜찮다고 했다. 

그 괜찮다가 "아직 살아는 있어"라는 뜻이라는 걸 엄마가 찍은 사진 한장을 보고 알았다. 


그 날부터 114일, 우리 아들이 집에 올 때까지 걸린 시간. 내가 엄마가 되어 간 시간. 

우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 내가 아직 마취에 취해 있을 때 친정엄마가 찍은 아들 사진. NICU(신생아 중환자실, 일명 니큐)에 들어가기 전 긴급하게 처치를 받고 있다. 


아이를 출산한 그 날 저녁, 남편이 찍은 사진>>

미숙아들은 최대한 엄마 뱃속과 똑같은 환경에 있게 한다. 그래서 따뜻하고 축축한 인큐베이터에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