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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riaMJ Nov 07. 2018

너와 함께 한 1년...

이른둥이 수기공모전 수상작

1.  살아줘서 고마워 

  우리 아들 이름은 “산”입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산과 같은 성품을 가진 넓고 깊고 흔들리지 않는 아기를 낳고 싶은 마음에 고심 끝에 정한 이름입니다. 산이는 참으로 산과 같아서 100일이 넘는 길고 긴 NICU생활을 꿋꿋하게 잘 버텨주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지난 1년 3개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산이를 처음 봤을 때, 정말 너무도 작아서 말 그대로 그냥 핏덩이 같던 그 여린 모습이 이제는 기억도 잘 안 나거든요. 그 약하고 부서질 것 같던 모습이 기억도 안 날 수 있게 잘 자라준 것만으로도 산이에게 많이 감사해야겠죠. 자, 산이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산이의 예정일은 2017년 10월 2일이었습니다. 군인인 아빠를 배려한 건지, 추석 연휴가 예정일인 점에 저와 남편은 고마워하며 하루하루 기다렸습니다. 사실, 결혼 후 1년 정도 있다가 아기를 가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산이의 임신은 우리 부부에게 기대하지 않던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일이었습니다. 하루하루 좋은 것만 먹고 듣고 보고 그러려고 노력하고 좋아하는 커피도 참으며 점점 무거워지는 몸에 조금씩 익숙해지려고 하던 임신 24주차. 초여름이 막 시작되던 6월 말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잠에서 깬 토요일 아침, 그런데 밑이 축축했고 배가 너무 아팠습니다. 보니 하혈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당장 다니던 병원으로 향했고, 의사는 조기진통이 왔는데 잘 잡히지 않으니 바로 대학병원에 입원하라고 했습니다. 응급실을 통해 바로 산부인과 분만실로 들어가 누웠습니다. 분만실에 그렇게 일찍 들어가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죠. 안쪽에는 저와 비슷한 산모들이 2~3명 정도 더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첫 날에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그저 무섭기만 했습니다.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소변도 침대에서 봐야 한다며 신신당부를 하는 의료진들 말에 숨 쉬는 것도 조심하며 자궁수축억제제와 항생제를 맞고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약을 바꿔도 진통은 잡히지 않았고 입원한 지 4일 째 되는 6월 20일 점심, 양수가 터져 침대 시트를 적셨습니다. 그 때 제 울음도 같이 터졌습니다. 막연하게도 그렇게 이른 주수에 태어난 아기가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엄마는 배 속 손자보다 제가 더 걱정스러웠는지, 아기는 또 낳으면 된다고 괜찮다고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우리 아기 살 수 있을까? 어떡하지?” 

  넉 달 가까이 일찍 아기를 낳는 조산이었어도 배는 찢어질 듯 아팠고, 설상가상 전치태반이라 저는 전신마취를 하고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대가 그렇게 차갑고 수술실이 그렇게 무서운 곳인지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회복실이란 곳에서 눈을 떴고 아기가 궁금했습니다. 여러 가지 체크를 하고 병실로 옮겨지는 데 엄마랑 남편이 보였습니다. “아기는?” “응 괜찮아, 신생아중환자실로 갔어” 그 순간 산이에게 가장 감사했습니다. 살아줘서 고마워, 아들                


2.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마워 


 산이가 태어난 한양대학교 병원 NICU의 면회는 하루 두 번 낮 1시와 저녁 7시 반, 한 번에 30분씩 아기 엄마 아빠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산이를 낳고 그날 저녁 진통제가 달린 수액걸이를 끌고 병실 복도 끝에 있는 NICU에 아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7시 30분이 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문이 열렸습니다. 비닐 가운을 입고 손을 씻고 마스크를 하고 안쪽 문을 한 번 더 열자 TV에서나 보던 인큐베이터들이 가지런히 있었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두근거렸습니다. 
  처음 본 산이는 눈을 가리고, 입에는 기관을 삽관한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고 있었고, 배꼽에 카테터가 연결돼 있었고, 무엇보다 피부가 너무너무 약하고 말랑말랑한 것이 순두부보다 더 연약해 보였습니다. 수많은 전선들과 약들과 기계들이 770그램 그 가녀린 몸에 연결돼 아들의 생명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그 기계들 중 아주 나중까지도 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 건 산소포화도와 혈압, 맥박을 체크하는 모니터였습니다. 자가호흡이 불가능하고 워낙 폐가 미숙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곧잘 산소포화도가 뚝뚝 떨어지곤 했기 때문입니다. 면회시간 도중엔 감사하게도 그런 적이 없었지만 입원 초기 밤과 새벽 몇 번씩 청색증까지 오곤 했습니다. 
  아, 울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었는데도 산이를 보고는 그냥 울음이 터져 버렸습니다. 아들에게 너무너무 미안했습니다. 다른 엄마들처럼 40주를 꽉꽉 채워서 잘 품고 있다가 세상에 나오도록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습니다. 조산의 원인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태반감염일 가능성이 크며, 아마 아기가 담배 연기 가득한 방 안에 있는 것 같았을 거란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는 가슴을 치고 또 쳤습니다. 저처럼 모든 이른둥이 엄마들이 처음 마주하는 벽은 바로 이 죄책감이라는 감정의 벽일 겁니다. 
  그 때 저희 엄마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기들은 엄마 감정을 다 안다고, 니가 울거나 슬퍼하거나 하면 아기도 다 느껴서 힘을 못 낸다고. 씩씩하고 밝게 사랑한다고 같이 힘내자고 말하고 오라고. 오직 부모만 면회가 가능한 니큐에 저희 엄마는 산이가 입원해 있던 114일 동안, 하루 두 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같이 가셨습니다. 복도에 놓인 대기실 의자에서 엄마는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엄마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었기에 저도 제 아기에게 든든하게 힘을 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의 조언대로 최대한 밝고 긍정적인 것만 생각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처음에 입원하면 특수 분유를 위관으로 1ml씩 먹기 시작하는데 그걸 잘 먹은 것만으로도 기쁘고, 황달 치료가 끝나서 푸른 빛 아래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뭔가 큰 진전이 있는 것 같고, 패혈증이 와서 항생제 치료를 받아야 했을 때도 아 다행히 뇌수막염이나 더 심각한 상태로 가지는 않았구나,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받아들여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있는 곳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매일 6번에서 8번, 30분씩 유축을 해서 모유를 모았습니다. 새벽 2~3시에도 젖을 짜고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니큐로 날랐습니다. 한밤중에 다음날 먹을 모유가 없다고 하면 택시를 타고 모유를 배달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갖다 준 모유를 산이가 잘 먹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또 영양제나 특수약품을 사오라는 미션(?)을 받으면 그렇게 좋았습니다. 뭔가 내가 해줄 게 생기니까요. 
  또 매번 갈 때마다 온갖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매미가 우는 이유,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시작되었다거나, 옆 침대에 쌍둥이 여자친구들 이야기 같은 걸요. 또 솜사탕, 작은별 등 동요도 메들리로 계속 불러주었습니다. 요즘도 산이는 솜사탕만 불러주면 울다가도 가만히 듣고는 차분해지니 참 신기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모든 상황을 보려고 해도 초미숙아인 아기의 상태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빈혈 수치가 잡히지 않아 6번이 넘는 수혈을 받았고, 염증수치가 치솟아서 2주 가까이 항생제를 달기도 했고 그렇게 균과 싸운 게 여러 차례. 투여되는 약물이 갑자기 늘어서 신장에 무리가 가 몸이 많이 붓기도 하고, 그러면 하루에 30그람이라도 찌면 소원이 없을 것 같던 아기 몸무게가 한번에 100그람 이상씩 늘어나 있어서 또 걱정. 제발 비켜가길 바랬던 미숙아망막증도 결국 3기와 4기 중간으로 진단되어 결국 퇴원 전 레이저 수술을 받았고. 모든 초미숙아들이 그렇듯 산이에게도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오고 가고, 이겨내고 그랬습니다. 그 많은 의학적 투쟁 중에도 가장 치열하고 중요했던 건 바로 호흡문제였습니다. 
  폐는 태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늦게 완성되는 기관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25주 1일은 아기의 폐가 양수 속이 아닌 공기 중에서 호흡을 할 만큼 자라기엔 아직 많이 모자란 날짜였습니다. 폐포의 개수도 적고, 그나마 있는 폐포들도 다 펴지지 않아서 폐계면활성제란 약물을 3차례 투여했습니다. 만일 이 약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아들도 없을 가능성이 크겠죠. 참 고마운 약입니다. 어떻게든 몸무게를 늘려야 했습니다. 결국 폐의 성장은 아기의 전체적인 성장이 뒷받침돼야 했으니까요. 초조하게 몸무게가 늘기를 기다리던 매일매일이었습니다. 그 사이 기흉이 생겨서 가슴에 관을 꽂기도 하고, 가스치료와 스테로이드 요법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태어난 지 47일 째 삽관돼 있던 기관을 제거하고 콧줄로 갈아탔습니다. 아들의 온전한 얼굴을 처음 본 날이었습니다. 면회 내내 산소포화도 모니터와 산이를 번갈아 보며 숨을 잘 쉬는지, 얼굴색은 괜찮은지 살피느라 30분이 후딱 지나갔습니다. 8월 첫 주 산이 몸무게도 1130그람을 돌파하고 주치의 선생님께 기적같이 잘 버텨주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내일이라도 집에 데리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패혈증 때문에 5일 만에 다시 삽관을 했을 때는 실망 보다는 첫 시도에도 그렇게 잘 버텨준 산이가 고마웠습니다. 안타깝고 조급해진 적도 많았지만 매번 크고 작은 이벤트들에 씩씩하게 버티고 이겨주는 아들이 참으로 대견했습니다. 몸무게 1500그람을 돌파하던 날 다시 기관을 제거했고 산이는 점점 스스로 호흡하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아들 덕분에 사람이 숨을 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거룩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숨쉬다’ 뿐인가요, 먹다, 싸다, 자다 등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일상에서 별로 중요하다고 여긴 적 없는 많은 활동들이 생명을 지탱하는 참으로 고마운 일임을, 스스로 그런 것들을 잘 할 수 없는 이른둥이란 존재를 통해 다시 배웠습니다. 


3. 초보엄마, 믿고 따라와 줘서 고마워 
  산이는 2017년 10월 11일 태어난 지 114일 만에 2.81kg으로 집에 왔습니다. 퇴원 전엔, 정말 피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피할 수 없던 두 가지 수술 - 서혜부 탈장 수술과 미숙아망막증 수술- 을 받았습니다.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그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초미숙아임에도 심장이나 뇌에 아무 이벤트가 없었던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기를 키운다는 것은 음, 그냥 신세계였습니다. 신생아 케어야 세상 모든 아기 부모들이 겪는 어려움이겠지만 산이를 돌봄에 있어서 이른둥이이기 때문에 특별히 마음을 써야 하는 몇몇 점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유난을 떤 것은 바로 감염관리입니다. 하필이면 환절기에 퇴원을 했기에 감기 같은 호흡기 질환은 저한텐 호환마마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집안 곳곳에 소독제를 비치하고 매일매일 미세먼지 체크는 필수, 하루 두 번 청소에 환기. 집에는 산이 할머니 말고는 누구도 오지 못했고, 외출은 오직 병원 외래만으로 제한했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좀 많이 유난을 떨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유난을 떤 덕일까요, 퇴원 때 가지고 온 산소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을 수 있었고 산이가 잠투정을 할 때 마다 삑삑거리던 산소포화도 모니터도 금방 졸업했습니다. 


 교정 100일이 들어서면서 수유거부가 왔습니다. 젖병을 바꿔봐도, 젖꼭지를 바꿔봐도, 자세를 바꿔도, 분유를 바꿔도 도무지 먹지 않았습니다. 한 번에 50ml를 먹이려면 1시간 씩 씨름을 해야 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참을 인자를 백 개씩 그렸습니다. 산이가 거부해도 먹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숙아에게 몸무게는 곧 생명이고, 잘 먹어야 아프지 않고 잘 자랄 수 있단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잘 먹지 않는 기간은 두 달 정도 이어졌고, 봄이 오면서 산이는 다시 식욕을 찾아주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 때 포기하지 않고 시간 맞춰 먹이려 노력했던 건 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랑 하나 하자면 현재 산이 몸무게는 10.5kg입니다. 

  많이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산이는 올 2월 폐렴으로 재입원을 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시나지스 접종을 5회 이상 받았고, 크게 위험하지 않은 바이러스였는데도 엑스레이 상에서 폐를 답답하게 가리고 있는 얼룩들이 입원 기간 중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약도 먹고, 호흡기 치료도 하루에 4~5회 하며 아이를 고생시켰는데도(정말 너무 싫어했거든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산이와 저는 퇴원 후 재택치료를 택했습니다. 급성이 아니라 만성으로 보이며 당장 며칠 안에 좋아지거나 하는 병변은 아니라 길게 보자는 주치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네블라이져를 키면 아이가 자지러지게 싫어합니다. 번거롭고 귀찮고 그러니까요. 그러데 요즘은 산이에게 ‘산아 호흡기 치료하자’이러면 가만히 잘 따라와 줍니다. 마치 싫어도 꼭 해야 하는 것을 아는 것 처럼요.          

  저는 지금도 미안함과 죄책감이란 감정과 싸웁니다. 산이는 얼마 전 교정 돌이 지났고 이젠 교정으로는 물론 생일을 기준으로도 발육이나 발달이 쳐지지 않지만 그래도 아기가 작지는 않은지, 대근육 소근육은 다른 아기처럼 잘 발달하고 있는 게 맞는지 늘 신경이 쓰입니다. 네블라이져도 필수고요. 그렇지만 저를 믿고, 너무너무 잘 따라와 주고 있는 산이를 볼 때면 미안함보다는 ‘파이팅하자!’란 마음이 더 커집니다.     산이는 이젠 제법 자기 고집과 주관이 뚜렷해지고 말도 잘해서 가끔 떼도 쓰고 저랑 실랑이를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이 아기가 한 때 1킬로그램도 채 안 되게 태어나 생과 사의 경계를 오고 갔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애써 떠올리지 않으면 말이죠. 그래서 산이를 혼내기도 하고 소리도 지르는 보통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통의 엄마, 제가 114일 니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되고 싶었던 것, 가장 부러웠던 것. 보통 아기 엄마들처럼 그렇게 사는 게 꿈이었는데 1년 만에 그렇게 살고 있으니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 

  어디서 읽은 글인데, 아기들이 태어날 때 엄마를 고른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종종 생각합니다. 아 우리 산이가 나를 엄마로 골랐구나. 잘 키워달라고, 엄마랑 함께이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잘 부탁한다고. 그래서 내 아들로 왔구나. 이런 생각들이요. 우리 산이 살아줘서 고마워. 무엇보다 엄마 아들로 와줘서 고마워!


  무엇보다 산이에게 가장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 만큼이나 산이를 건강하게 잘 돌봐주고 키워주신 한양대학교 신생아중환자실 의료진들께 감사드립니다. 박현경 실장님, 이현주 교수님, 레지던트 선생님들, 산이를 my산이라고 부르며 엄마처럼 지켜주신 많은 간호사 선생님들 정말 진심으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지금도 많은 이른둥이들이 태어납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하루에 한 걸음씩 엄마 품으로 가고 있는 그 아기들은 존재만으로도 희망과 기적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의료 수준의 바로미터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아기를 살릴 수 있게 해 주셔서요. 아기가 살 수 있게 해 주셔서요. 세상의 모든 이른둥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길 기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올해 이른둥이 수기 공모전에 제출한 글로, 본 글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른둥이 부모님들과 관심있는 분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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