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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riaMJ Mar 09. 2021

Polyp

싹과 뿌리

엄지손톱만 한 살덩이를 떼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고통을 동반했다. 엄밀히 말해 통증이라기보다는, 

내 몸에 뜻밖에 침입한 외계의 존재가 주는 이물감 같은 것에 가까웠지만. 아마 낙태를 선택한다면, 그리고 미프진과 같은 약물이 없다면 받게 될 ‘소파술’의 기분 나쁨 긁어냄과 아리고 시린 느낌이 이런 걸까 어림짐작해보았다. 생리 때가 아닌 데 피를 보면 여자들은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놈의 피’. 나와도 걱정, 안 나와도 걱정, 늦어도 걱정, 빨라도 걱정, 아무 때나 나와도 걱정. 큰 문제가 없으리라 바라면서 내심 용종일거라 추측했는데 역시나였다. 자궁경부에서 폴립Polyp을 제거하는 시술을 받은 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의사는 생각보다 큰 크기에 아마도 뿌리가 남을 거라고 했다. 뿌리, 그러니까 흔적. 어디 용종만 그럴까. 13살에 잡아 뜯었던 여드름은 여전히 내 관자놀이에 옅은 흉으로 남아있고, 산이를 낳은 흔적은 아마 죽어서도 살이 썩어 없어지지 않는 한 내 배에 남을 것이다.      


「polyp, 점막에서 융기한 병변, 비정상적으로 돌출하여 성장한 것」     


전화기를 열고 ‘자궁 용종 원인’이라고 검색해본다. 이어서 자궁에 좋은 음식도 찾아본다. 인터넷의 많은 글들은 여드름, 비만, 탈모, 당뇨병에 고혈압까지 대부분 병의 원인을 하나로 압축하는데 바로 스트레스다. 인과를 증명할 길이 없고, 증명할 필요도 없이 불안을 확인해주고 그로 인해 묘한 망각까지 갖게 하는 심플한 해답. 나도 대충 몇 번 찾아보며 길을 건너다 금방 잊어버린다. 하지만 망각이 소멸이 아닌 이상 내가 잊어버린 사이 나도 모르는 내 몸의 여러 ‘원인’들이 살 속에, 피 속에, 뼈 속에, 영혼 속에 꼭꼭 숨어 있다가 말하자면 뿌리를 내리고 있다가 발아하는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가뭄이 들면 흙 속에 쳐박혀 적당한 습기와 온도를 기다리는 씨앗처럼 내가 약해지는 시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발아한 원인’이 바로 저 polyp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슬픈건가. 아니면 화가 나는 건가. 


의사는 이제 나이가 서른 중반이니 서서히 생리 주기도 틀어질 거라고 말하며 ‘네? 벌써요?’화들짝 놀라는 내게 ‘그럴 때예요’라고 건조하게 말한다.      


불이 모두 꺼진 거실에 가만히 눕는다. 혀끝을 맴돌다 끝내 삼키는 ‘하지 못한 말들’과 잘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들, 그럼에도 또 자고 일어나서 생활해야 하는 일상의 무게들에 대해 생각한다. 짓눌리지 말자. ‘지지 말자’가 아니라 짓눌리지 말자. 다리가 부러져도 살아낸 여자들이 있고, 평생을 가슴에 철심을 박고 살아낸 여자도 있다. 피를 뽑아 글을 쓰고 뼈를 갈아 생애를 지탱한 여자도 있다.      


내 등뼈를 따라 뿌리가 나와 땅을 뚫고 길게 길게 뻗어간다. 땅이 척박할수록 더 억척스럽게 뻗어가는 뿌리는 삶이란 흙을 움켜쥔다. 쓰러지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애초에 무얼 이길 생각은 버린 지 오래다. 생애의 앙금이 육체에 어떤 뿌리를 내린대도 그래서 노상 내가 이리저리 휘청인대도 때론 부러진대도, 때론 돌팔매를 당하더라도 나는 짓눌리지 않는다. 그런데 알고 있다. 그게 가장 어렵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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