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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loriaMJ Apr 19. 2021

도발적인 질문에서 시작된 각성

결국 육아의 최종 지향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계획하는 것을 좋아하고 꿈꾸는 것을 좋아한다. 늘 무언가 배우고 싶어했다. 운동도, 그림도, 악기도, 언어도.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짝사랑을 앓는 열병에 몸이 달뜨는 것처럼 얼굴이 발그레해지곤 하는데 그런 감각을 약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바쁘단 핑계로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배우고 싶은 어떤 열망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쉬운 것들 – 가령 사람을 좋아한다거나, 물건을 산다거나 하는 그런 쉬운 것들에 주저 앉아 있었던 시간이 꽤 길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아들의 미래를 생각했다. 

계기는 단순했는데 동아일보에 실린 서울대 총장과 카이스트 총장 두 분의 대담 인터뷰 기사였다. 내용이야 평이했지만, 하나의 질문 “왜 한국은 직접 백신 개발에 실패했고 미국은 성공했는가” 이 도발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이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초기에 한국은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방역에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지금은 제약회사들의 입만 바라보며 백신 구걸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며, 이런 식으로는 코로나가 아니라 그 어떤 팬데믹에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질서, 관료주의, 기록, 저인망 스타일, 모범 등등 

우리가 성과로 이룩한 것들이라 자부하는 것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질문이 없다는 거다. 남들이 답이라고 하는 것들을 ‘그냥’ 계속 반복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뭔지도 모르겠는 소독액을 길 바닥에 뿌리면서 그게 코로나19를 막아줄 거란 착각을 하고, 계속 마스크를 벗고 있어야 하는 목욕탕과 식당들은 셧 다운을 안 하면서 체육시설은 문을 닫는 도저히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조치들이 줄을 이은 거다. 


우리의 이 같은 대응에는 ‘질문’이 없다. 


물론 질문도 제대로 된 질문이 중요하겠지. 스웨덴처럼 ‘우리는 한 번 인간의 면역에 기대어, 집단면역을 해 볼까?’ 이런 헛발질 질문은 결과론적으론 안 하니만 못 한 질문이겠지만 우리처럼 답.답.답.답만 하는 대답만 있는 정책보다는 방향성에 있어 진보한 방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총장님은 이를 주입식 교육의 한계라고 했는데, 일갈하면야 그 보다 더 나은 설명은 없다. 주입. 무엇을 주입하는가하면 바로 답이다. 근데 답은 누가 정하는 거지? 많은 사람들이 답이라고 정한 것을 모두가 정말 실재하는 유일한 답이라고 믿고 그 믿음에 근거해 주입한다. 


나 역시 상당히 삐딱한 인간형이지만 타고난 승부욕 덕분에 그 주입식 교육 시스템에서도 살아남았다.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최상위 생존자였고 대답하는 것에 더 익숙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대학에 가서 모든 게 시들해졌고 재미가 없어졌으며 스무살이 되어 비로소 인생의 질문을 시작했다. 그렇게 5년여를 보내고 스스로 돈벌이를 하는 인간이 되면서 질문의 제한도 사라졌는데, 어느 순간 바보 같이 결혼을 하게 되고 애를 낳고 기르면서 또 주입된 시스템이 스멀스멀 작동하려고 한다. 

아이 기르는 데에는 그리고 아이가 있는 사람으로서 인생을 사는 데에는 답이 없는데 게으르거나 지성이 부족하다면 주입된 방식을 답으로 생각하기가 쉽게 된다. 


각성!

오늘의 그 기사를 접한 건 이른바 각성의 순간이었다. 내가 하우스푸어로 전락하면서까지 집을 사고, 좋은 학군에서 애를 기르려고 했던 건 결국 무엇을 위해서였나. 

잘 되어봐야 나와 똑같은 수준과 정도의 어른으로 아이를 기르는 것이 내 육아의 목표인가. 


나는 아이를 어떤 수준의 아이로 기르고 싶은가.

나는 아들의 탯줄을 담은 도장을 만들면서 거기에 문구를 하나 새겼다. 


자유롭고, 건강하게

선하고, 현명하게 


내가 생각하는 제1의 가치는 자유다. 

자유로이 사는 아이의 삶이 선하고 현명해서 

이 세계를 조금 더 진보된 곳으로(사상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만드는 삶을 살게 하는 것... 

그래서 결국은 나에게서 완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개체로 떠나게 하는 것 

이게 내 육아의 최종 지향이다. 


그럼? 내가 지금 요 몇 년 간 한 행동들이 거기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정말로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거다. 


아이라는 계획하지 않은 미래가 도래해서 내 자유를 많이 제약당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이가 없었다면 절실하게 고민하지 않았을 많은 것들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 역시 내가 생각하는 육아의 최종지향점이 그리는 인간이 되도록 더 삶을 의미있게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존재로 인해 이 세계가 어제보다 한 걸음 더 진보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는 삶. 내가 생각하는 사는 의미다. 아들에게 그런 본보기가 되고 싶다.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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