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완 Oct 24. 2020

#1 죽어볼까 써볼까 하던 아침

 아침이 나를 양칫물처럼 뱉어버린다. 침대에 널브러진 몸이 쏟아낸 토사물 같다고 느낀다. 핸드폰 알람은 욕설처럼 나를 깨운다. 오늘도 좌절감에 눈을 뜬다. 자고 있을 때 고통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별다른 욕심이 없는 내가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었다. 이 바람은 나의 다른 많은 욕심들과 마찬가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계를 본다. 오 분 간 더 자기로 한다. 오 분. 내가 나의 운명에 유일하게 그리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시간이다. 내 운명에 대한 저항이 모두 그러하듯 증거도 없이 오 분은 사라진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 후에야 혼나듯 일어난다.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오늘도 왜 일을 나가야 할까’라는 생각만큼은 떠오르지 않게 하는 일이다. 더 이상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나의 이력처럼 단순하게 행동하기로 한다. 화장실로 가서 정수리에 물을 들이붓는다. 물이 나를 지나간다. 씻어도 씻기지 않는 것이 있다. 수챗구멍에는 지저분한 머리카락들이 엉겨 있다. 한참을 쳐다보다가 그것들이 부러워졌다. 최소한 어디인가에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출근을 준비한다. 왜 이 일을 해야 할까. 왜 일을 나가야 할까. 왜 살아야 할까. 문득 침범하는 ‘왜’라는 질문을 붙들고 싸운다. 머리를 말리다가, 양말을 신다가, 엊그제 벗어놓은 바지를 방 한편에 쌓여 있는 옷 무더기에서 꺼내어 주워 입다가 생각과 싸운다. ‘왜’라는 질문을 이길 수 없다. 바짓단에 발을 욱여넣는 일이 고역이다. 준비는 끝났다. 제 멋대로 놓인 신발에 억지로 나를 꽂아 넣었다. 죽을까 하는 고민을 잠깐 하다가 나는 일터로 구정물처럼 흘러갔다.     


 직장에 가면 곁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곁을 둘러싼다. 그들은 협소한 자신들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협소한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들의 협소함을 드러내는 일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어서 자주 부끄러워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신이 신경 쓰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운명들. 신이 우리들의 운명을 창조하는 데에는 한 번의 검토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사실 그들 중 가장 모자라고 협소한 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비밀스럽게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목격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나와 걸맞은 협소함의 틀에 욱여넣는다. 백일몽을 꾼다. ‘나는 이들과 다른 차원의 삶에서 살아야 하며 곧 그렇게 될 것이다.’라는 헛된 믿음은 꽤 오랜 시간 계속되었으며 결국 완전한 허구로 밝혀졌다.     


 죽음을 생각한다. 내팽개쳐진 운명의 가장 합당한 결말. 끝내 내가 나로 살 줄 알았다면 이 결심은 꽤 오래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버티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기기만, 공상, 격리와 망상, 투사, 퇴행, 수동적 공격성.. 저열한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데 있어서만큼 나는 천부적이었다. 그리고 그 천부적인 소질이 나를 죽어가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 데도 속할 수 없었다. 나에게 소속되지 않은 나는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다.     


 직장의 일은 대충, 그리고 빨리 끝내야 한다는 단 한 가지 열정만을 일으켰다. 그런 열정에 휩싸이는 것이 내겐 가장 합당해 보인다. 사소한 것들은 놓칠 때가 많다. 아니, 놓치고 싶다. 이런 일을 하면서 나를 소비하기는 싫다. 나는 조금 더 가치 있는 일에 소비되어야 한다.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서둘러 퇴근을 한다. 그리고 집에 틀어박혀 멀뚱멀뚱 핸드폰이나 붙잡고 있는 것이다.     


 지난 오 년간, 퇴근 후의 생활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허물처럼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누워버리든지 잠을 자든지 한다. 할 일이 마땅찮으면 컴퓨터를 켠다. 글을 써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 지 몇 년이 흘렀으나 컴퓨터를 켜고 하는 일이라곤 시답잖은 사이트에 들어가 그곳에 올라오는 글을 보는 일이었다. 때로는 그 날 올라온 모든 글을 읽은 적도 있다. 그것이 내 삶이고 내 생활이었다. 나의 유일한 사회적 활동이었다. 친구와의 만남도 그룹의 일원이 되는 일도 내게는 항상 어색하고 불편한, 내게서 벗어나버린 내가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어설피 쌓은 모래산처럼 스멀스멀 허물어져버리는. 아무런 의미도,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도, 그런 시도도 무의미한, 철저하게 시간이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이러다 보면 다 잘 되겠지.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 바뀌겠지. 지금의 나는 임시로 존재할 뿐 본격적인 나와 나의 세상이 어딘가에 기다리고 있겠지. 이런 종류의 공상들이 시간을 채웠다.     


 이것을 우울이 게워낸 더러운 흔적이라고 하자. 나는 짙은 우울의 운명을 지독하게 겪었으며 겪고 있다. 그 시간 동안 하나의 바람이 있었다. 이 끈적한 무엇을 글로 적어보자는 것이었다. 우울해서 십 년쯤 미뤄둔 일이었으나 이제 시작해보려 한다.


 ‘이것이 나의 가장 적합한 직장이다. 이 일이 완전히 빗나간 내 삶의 궤도를 측정해 볼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써야 한다.’ 라는 결심을 천 번째쯤 하던 아침이었다. 만일 이것이 글이 되어 나온다면 천 삼백 번쯤의 결심 뒤에 나온 것이다. 우울이라는 세상에서 결심은 귀신같은 것이다. 아무도 그 실체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마 지옥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20 자기연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