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제는 다르게 살아보자
이성과 감정의 조화. 참 아름다운 말이야. 그럼 이제 감정적인 당신을 위해 강력한 이성을 주입시켜 줄게. 이성을 키울 준비, 되었습니까?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해병대 캠프에 입학하는 심정으로.
그러고 보니 우리 도도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네. 맙소사. 이런 날이 오다니. 결혼 생활이 정말 꿈만 같다. 아이 아빠가 된 것도 엊그제 같은데. 정말 엊그제 아닌가? 시간 지각 능력이 심히 문제가 있는 것 같네. 이제 학부형이 되다니! 학부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아이는 쑥쑥 커가는구나. 지난 세월 뭘 하고 살았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좀 더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곁에서 잘 지켜보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기도 해. 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새삼 걱정이 되고 떨리네. 초등학생의 아빠 역할을 잘해야 할 텐데 말이야.
자기는 어떤 심정인지 궁금하네. 그래도 나보다는 매일 아이들과 씨름하면서 가까이에서 크는 모습을 지켜봤으니 덜 아쉬울 것도 같고, 그래서 더 감회가 새로울 것도 같고. 나는 초등학교 입학이라는 단어에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던 것 같아. 지금까지 이렇게 세월이 빨리 흘러갔는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빠르게 갈지. 곧 있으면 대학교 간다고 하지는 않을까 봐 걱정이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어제 아이들하고 공원에서 산책하고 함께 놀면서 마음이 뭉클했어. 자꾸 내 손을 잡고 가려는 아이들. 원래는 아빠는 늘 뒷전에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은데 내 손을 잡는 게 참 감격스럽더라고. 사실 일 한다고 크게 신경도 못 썼으니 할 말이 없기도 한데 이제 컸다고 아빠를 인정해 주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알고는 있었지만, 아이들 손이 참 따듯하더라. 수족냉증에 가까운 내 손에 아이 손의 따듯함이란. 내가 더 따듯하게 손을 잡아주지는 못할망정 말이야. 나는 아이들에게서 내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어. 이렇게 차가운 아빠 손이라도 꼭 잡고 가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이 감동으로 다가왔지. 그래서 더 손발이 따듯한 아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그러려면 기존에 살아왔던 방식 하고는 조금 달리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어.
일단 정말로 몸을 따듯하게 잘 돌볼 것. 제때 영양가 있는 식사를 잘할 것. 사실 이 부분이 우리가 서로 많이 부딪힌 부분이었잖아. 나는 아무렇게나 식사를 때우면 된다는 생각이고, 자기는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간단하게 식사를 때우려는 나에게 자기가 뭔가 챙겨주려고 하면, 단지 어떻게 챙겨 먹었냐는 말을 하기만 해도 나는 짜증이나 화가 나기도 했지. 중요한 건 안 챙기고 뭐 이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쓰는 거라는 생각에. 이렇게 쓰면서도 머쓱하긴 해. 그게 뭐 짜증 내고 화낼 일인가? 챙겨주면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나란 인간도 이렇게 보면 참 꼬인 구석이 있단 말이야. 정말 속마음은 챙겨주니까 고맙기도 하면서 중요하지도 않은 식사 ‘따위’에는 자기도 신경을 좀 덜 쓰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 배배 꼬였지? 미안해 어째 이렇게 생겨먹었나 모르겠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겠어. 맛있는 것도 찾아 먹을 줄 아는 인간이 되어 보려고 해. 이건 나에게 있어 엄청난 도전인 것 같아. 사람들과 맛집을 찾아갔다가 40여 분을 밖에서 기다렸던 날의 분노를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거든. 배고파 죽겠는데 맛집이든 뭐든 왜 이렇게까지 기다렸다가 먹는 거야. 그냥 옆집에서 얼른 먹는 게 남는 장사 아닌가. 이런 생각에 추위에 떨면서 화가 났었지. 그런데 같이 갔던 사람들은 좀 배고프다고 해도 넉넉히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있었어. 희희낙락거리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낯설게 느껴졌어. 도대체 이 사람들의 위장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배고픈 나머지 뇌 속에 마약성 진통제인 엔도르핀이 분비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 다들 웃고 있는데 혼자 화내고 있는 사람은 좀 웃기잖아?
그래. 이제는 좀 다르게 살아보자. 전에 자기 계발 교육에서 만났던 분에게 들었던 한마디의 말이 기억에 남아. ‘저는 삶의 철학이 있어요. 음식은 맛있게 먹어야 해요.’ 나보다 10살은 많은 그분의 그 한 마디가 뇌리에 깊이 남았어. 교육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이 그 말이니 말 다했지. 교육은 중요한 게 아니었어. 음식도 맛있게 먹을 줄 모르는 사람이 성공은 해서 뭐 하나. 성공해도 맛있게 못 먹을 텐데 말이야. 난 대체 무엇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참 기막힌 노릇이었어. 나 자신이 일상의 즐거움을 다 유보한 채 살아가는 것 같이 느껴졌거든. 내 옆에는 맛집을 찾아다닐 줄 알고, 언제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고, 맛있는 걸 먹으면 언제든 기분이 풀리는, 단순한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있었는데. 난 까막눈을 살아왔던 것 같아. 짝꿍의 소확행 능력을 철저히 무시한 채 나만 잘난 체 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영 아니올시다, 인 거지.
뼈저린 반성을 하고 나서도 내 성향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더라고. 음식을 먹을 때는 혼신의 힘으로 음식을 음미하는 것, 맛있게 먹을 줄 아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라고 생각해. 자기의 대단한 능력을 인정하고 본받기로 했어. 이제부터는 더욱 맛있게 먹는 법, 맛있게 사는 법을 연습하려고 해. 그리고 맛집도 더 찾아다니고. 함께 인생을 음미하며 살고 싶어. 걱정도 팔자라고 걱정 하나는 정말 잘하는 나이지만 이제는 걱정을 음미하는 대신 음식을 음미하자는 생각.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아내의 식탐을 담자는 생각. 이제 자기의 식탐을 조금 더 허용하고 살려고 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는 그 능력은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능력인 것 같아. 나에게는 황무지처럼 크게 계발되지 않은 영역. 이제 미지의 우주를 답사하는 느낌으로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고. 다행히 그 우주에 대해 아주 잘 아시는 분이 옆에 계시니 저를 잘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또 음식을 무시하는 발언과 행위를 하거든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보고 한마디 해주길 바라. ‘음식은 맛있게 먹는 거야.’ 내 식탐도 잠에서 깨어나는 그날이 올 때까지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