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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호 May 20. 2021

삶과 죽음이 걷는 길 위에 있다

11구간 (4.4)

비는  오는데 바람은 차다. 오늘은 흐린 날씨를 감안하여 바닷길보다는 숲길을 택했다. 모슬포항에 있는 하모 체육공원에서 걷기를 시작했다. 포구를 빠져나오자 길은 해안으로 접어들었지만 해안을 따라 오래가지 않는다. 내륙 방향으로 접어들면 길은 멀리 보이는 모슬봉으로 향한다. 모슬봉 정상에는 레이더 기지가 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마늘밭을 지나 모슬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유난히 묘지가 많은데 모슬봉 입구 산기슭에는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에는 성묘객이 많아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내일이 바로 한식이다. 공동묘지 한가운데로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을 끝까지 오르니 전망이 열리며 머리에 구름을 두른 산방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흐린 날씨로 인해 시야는 좋지 않다. 산길을  올라가니 레이더 기지 바로 밑이다. 일반인들은 정상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모슬봉을 내려오니 돌담을 두른  사이로 길이 이어진다. 밭에는 보리는 이삭을 패기 시작했고 마늘과 양파는 수확철이 되었다. 무우는 어쩐 일인지 수확을 포기하거나 갈아엎어 놓은 곳이 많이 보인다. 어제 하루 종일 비가 내린 탓에 길이 진창이고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진창길을 요리조리 피하고 웅덩이를 건너뛰어도 신발은 흙투성이가 되었다.


양파수확이 한창인 밭을 지나니 천주교 공동묘지가 나온다. 마침 묘지에는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삶과 죽음이 걷는  위에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차이가 모든 이들의 삶과 죽음을 구분 지어 놓았을 뿐이다. 걷는 날이 반복될수록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마음속의 살아오며 쌓인 앙금이 걷기가 계속되면서 씻겨 나가는 느낌이 든다. 밭과 마을을 지나니 난대림과 온대림이 섞여 자라는 곶자왈이다.


도립공원인 곶자왈은 원시림 그대로의 숲으로 작은 관목과 풀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이리저리 이어지는 꽂자왈 내부 길을 걷다 보니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호젓한 곶자왈 숲길을 나서니 인형리 마을이다. 수백 년은 되었을 듯한 팽나무들이 마을 곳곳에 있다. 쉬지 않고 4시간을 걸었더니 발바닥이 불편하다.


점심때가 지나 시장기도 느껴지지만 다리  할만한 곳이 없다. 내처 걸어 오늘의 마지막 지점인 무릉 외갓집 농장에 도착했다. 차와 음료를 파는 농장인데 오늘따라 문이 잠겨있다. 근처 조그만 식당도 문을 닫았다. 춥고 배고픈 가운데 오늘 걷기를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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