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루 Apr 10. 2018

그래도 사랑해

영화 <레이디 버드>

애증(愛憎)의 관계란 무엇일까. 감정은 항상 양면적이라서 사랑의 이면에는 미움이, 미움의 이면에는 사랑이 숨어있기 마련이다.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 때로는 오래된 연인이, 때로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가 애증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애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상은 가족이다. 여기서 가족이란 단순히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집, 나의 고향, 나의 삶, 출생과 근원을 아우르는 뜻이다. 프로이트의 언어를 빌리자면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원형(原形)에 대한 애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이디 버드>는 너무나 '그레타 거윅'스러운 영화다. 나는 그녀를 <프란시스 하>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배우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단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우는 무언가 일관된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일까? 그녀가 처음으로 감독을 맡은 이번 영화를 보고 나니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레타 거윅은 삶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삶은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크리스틴의 가정은 형편이 좋지 않다. 학교에는 부유한 집안에 얼굴도 예쁜 친구들이 많은데, 크리스틴은 뭐 하나 가진 게 없는 것 같다. 백마 탄 왕자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남자 친구 후보들은 알고 보니 하나같이 이상한 놈들뿐이다. 그녀는 부모님이 밉고 자신의 고향 새크라멘토가 밉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 크리스틴까지 미워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I'm Lady Bird." 



나는 어떤 문제가 주어지고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극복한 끝에 짠! 하고 그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내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영화를 좋아한다. 주인공이 자신의 문제와 씨름하고 때로는 절망하며 그 문제를 미워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레타 거윅은 그 과정을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녀의 스타일대로, 유쾌하고 사랑스럽게. 


새크라멘토를 떠나 대학생이 된 크리스틴은 마침내 대학 동기에게 레이디 버드가 아니라 크리스틴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뭐, 딱히 그녀의 인생이 바뀐 건 아니다. 대학생활도 뻔한 술자리, 뻔한 연애, 뻔한 숙취의 연속일 것 같다. 그러나 방황의 시기를 겪은 크리스틴은 애증이라는 양가감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삶을 미워하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문제들을 끌어안고 나아가려고 한다. 성장이란 이런 게 아닐까?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을 바라보다가 머릿속에 어떤 문구가 떠올랐다. 니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단지 이것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자신의 삶을 미워하며 방황하고 있는 모든 이에게 니체의 금언은 유효하다. <레이디 버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뜻대로 되는 일 하나 없는 게 인생이라 해도 그것이 아름답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네 삶을 사랑하라. 

매거진의 이전글 불륜 영화를 향한 시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