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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Jun 28. 2018

왜 소설을 읽나요?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고등학생 시절에는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문학 작품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학생기록부를 풍성하게 채우려고 괜히 어려운 책을 빌려다가 제대로 읽지도 않고 독후감을 쓰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읽는 소설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자연스레 문학과 멀어졌다. 대학에 가서는 단 한 번도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입대 후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는 시간에 마땅히 할 게 없어서 책을 뒤적였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원해서 소설을 읽는다. 비로소 순수한 독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은 소설을 읽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래도 그만큼 먹고살기 힘든 시대라서 그런 걸까. 이곳에서도 고시 공부나 취업 준비로 바쁘게 사는 친구들을 여럿 본다.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에 비해 전공과는 상관도 없는 문학 작품들을 탐독하고 있는 나는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는 사실이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은가.) 그러나 나는 소설을 읽는 시간이 낭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 자신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기로 하자. 왜 소설을 읽는가?





가벼움과 무거움.


이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 가치이며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주제이기도 하다. 가벼움과 무거움은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다. 쿤데라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삶은 가벼운가, 무거운가? 또는 이렇게 바꿔 물을 수도 있다. 가벼움과 무거움 중 어느 것이 긍정적인가? 가벼움이 긍정적이고 무거움이 부정적인가? 또는 그 반대인가?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움이 긍정적이고 무거움이 부정적이라고 말했다. 그와 달리 베토밴은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대체로 베토밴과 의견을 함께 했다. 나는 무거움을 추구하고 가벼움을 경멸했다. 그런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런 생각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읽는 내내 혼란스럽고 어렵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책을 덮어도 온종일 작가가 던진 질문들이 머리에 맴돌았다. 나는 알 수 없는 행복을 느끼며 이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니체(F. W. Nietzsche, 1844~1900)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논의의 밑바탕에는 영원회귀라는 사상이 존재한다.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불교의 '윤회'와는 엄연히 다르다. 영원회귀는 어떤 사람이 죽으면 다시 그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전과 똑같은 인생을 살고, 이를 영원히 되풀이한다는 개념이다. 니체의 사상에 따르면 순간과 일생의 가치가 전도된다. 인간의 일생을 길어봤자 100년 남짓이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의 사소한 행동과 선택 하나도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된다. 그만큼 인간의 삶은 무거워진다.


그런데 쿤데라는 니체의 사상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는 영원회귀를 우스꽝스러운 신화라고 칭하며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17p)'라고 말한다. 무한대에 비하면 1은 0으로 수렴하여 무(無)와 다름없는 숫자가 된다. 영원한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에 비해 우리 인생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삶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진다.




이러한 철학적 논의들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꺼내 든 이유는 '왜 소설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평범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다양한 삶과 가치관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는 절대 타인의 삶을 직접 경험할 수 없다. 실은 본인의 삶마저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매사를 너무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여 가벼움을 배우고 싶어 하는 테레자의 모습은 영락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나는 테레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신념들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쳐 볼 수 있었다. 반대로 사비나와 토마시는 나와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닌 타인의 삶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렇듯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나는 나 자신과 타인의 삶을 제삼자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두 번째로, 소설은 '낯설게 보기'를 통해 사고의 한계를 확장시킨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역설과 도치, 해체, 모순으로 뒤덮인 소설이다. 쿤데라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들의 의미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현기증'이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는 높은 곳에 올라가면 혹시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현기증이 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쿤데라는 '현기증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98p)'이라고 말하며 단어를 새롭게 정의했다. 또한 그는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80p)'라는 문장을 남김으로써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뒤집었다. 앞서 언급했던 영원회귀에 관한 해석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소설에서 가벼움과 무거움, 저주와 특권, 행운과 불운 등에 관한 이분법적 사고를 와해시켰다. 이러한 시도는 독자를 혼란에 빠뜨림으로써 결국에는 스스로 갇혀 있던 사고의 틀을 깨부술 수 있도록 돕는다. 말하자면 우물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과 삶의 복잡성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위의 두 가지만으로도 처음 질문에 대한 답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소설을 읽는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 니체의 영원회귀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이 결코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은 단 한 번뿐이고 절대 되돌아갈 수 없다고 믿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지금 이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라'라고 말했다. 그가 영원회귀를 주장한 이유는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쿤데라도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았듯 영원회귀라는 신화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우리의 삶은 가볍다고도, 무겁다고도 할 수 없다. 삶의 무게는 분명 그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모든 소설은 인간의 삶을 주제로 하기에 필연적으로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가 읽은 모든 소설에 대한 독후감인 셈이다. 삶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나 인생은 단 한 번뿐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확신을 가지고 선택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그 사이에서 어떻게든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함이다.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은 삶을 꿈꾸며 나는 계속해서 읽고 또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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