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랑할 것뿐이다, 알 수 없는 무엇을
“희망이 있어도 나는 희망을 사랑하고, 희망이 없어도 나는 희망을 사랑한다. 내가 희망을 내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에도 나는 희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갓 스무 살, 내가 흠모하던 어른 선배는 발터 벤야민을 열심히 읽었다. 스물일곱에 알게 된 훌륭한 친구도 발터 벤야민을 권했다. 서른 살에 시작한 sns 친구는 발터 벤야민의 책을 선물했다. 서른하나에 인연을 맺는 은사님은 발터 벤야민을 사랑하셨다, 『일방통행로』를 꼭 읽어보라 강권하셨다. 나는 이렇게 과분한 인연에 둘러싸여 산다. 물론 ‘1세대 아이돌’ 벤야민도 그러하다. 그래서 내게 그는 ‘발터 베냐민’이 될 수 없다. 이건 아무리 ‘바흐’가 옳은 외국어 표기법이라 강조해도 ‘바하’만이 내게 바하임과 다르지 않다. 백만이 바흐라 불러도 나는 바하라 부른다. 십만이 베냐민이라 불러도 내게 그는 벤야민이다.
이름만 들어도 안다, 벤야민이 유대계라는 걸. 베를린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 뮌헨을 거쳐 철학과 언어학에 심취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학문의 향기 가득한 독일에서 뿌리내릴 자신을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저 끔찍한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언제나 살기 어려울 때면 소수자의 안위는 불안해진다. 그는 재빨리 중립국 스위스로 이동해 공부를 지속하지만 이때부터 그는 피곤해진다. 사회주의독일노동당이 나치스로 명칭을 변경하고 파시스트 아돌프 히틀러가 제1당수로 선출되면서 굽힐 줄 모르는 이 철학자의 생은 더 끔찍해지고야 만다. 그는 나치스를 경멸하고 그들의 폭력적 성격을 예감했다. 인간 화재경보기, 좌파 아웃사이더가 되어 거대한 폭력에 맞서 반전운동을 벌인다. 그는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는 자기주장처럼 일반인에게 가까운 미디어를 고민하다가 라디오방송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저 멀리 파리에서 독일까지 들려오는 명랑한 목소리. 재기 넘치는 입담과 핵심을 찌르는 내용에 나치스는 약이 올랐지만 별 수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1928)를 다시 펼쳤다. 그는 요즘으로 치면 난민(難民)이다. 위험을 피해 도망 다니는 언어철학자는 책상에 진득이 앉아 긴 글을 쓸 틈이 없었다. 종이쪽지에 휘갈겨 쓴 글줄들이 배낭에 꽉 차게 굴러다니면 어느 날 그러모아 책으로 엮곤 했다. 그의 아포리즘(Aphorism, 인생의 깊은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 얻은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기록한 명상물로서 가장 짧은 말로 가장 긴 문장을 표현한다)을 모은 이 얇은 책은 분절적이고 신비적이다. 약간의 초현실주의 분위기가 나기도 한다. 당대로는 실험정신 그 자체였다고 한다.
“한 사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방법뿐이다. (The only way of knowing a person is to love them without hope.)_발터 벤야민, 「중국산 진품들」, 『일방통행로』”라는 글을 읽는 순간 피에르 퓌비 드샤반(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이 떠올랐다. 「기구」와 「비둘기」, 드샤반의 반전운동과도 같은 고요하나 강력한 그림 두 점을 여기 소개한다.
보불 전쟁의 한가운데인 1870년, 파리가 프러시아 군대에 둘러싸이고 절박한 위협을 받고 있을 때, 영혼의 뿌리 같은 자기 고향이 프러시아군에게 공격당했을 때. 퓌비 드샤반은 파리 성벽으로 오른다. 고요히 붓질한다, 저 멀리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라며 소원을 올려보낸다. 오노레 도미에는 당대를 풍자한 석판화로, 쿠르베는 그림으로 정세를 비판했지만 그는 그런 강한 성정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르누아르나 바지유처럼 전쟁에 뛰어들 만큼의 용기는 나지 않았다. 피사로와 모네처럼 영국으로 피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 고향을 지키고 싶었다. 프랑스의 심장 파리를 위해 군복을 입었다. 옷이 바뀌었다고 목숨 같은 그림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전과 같을 수도 없었다. ‘전쟁’이라는 메시지를 담으려 하니 그가 숨결처럼 사용하던 푸른빛을 쓸 수 없다. 이렇게 조심스레 「기구」를 그렸고 그 해 11월 말 드디어 세간에 발표한다. 프러시아는 1871년 1월 말까지 파리를 점령했다. 이즈음 드샤반은 「비둘기」라는 작품을 쌍으로 그려 나란히 벽에 걸었다. 따뜻하고 온안한 색, 그러나 침묵을 드러내는 브라운이 그의 마음을 비춘다. 감히 말 한마디를 더하는 것이 두렵다는 듯 고요하고 차분하다.
「기구」를 들여다보라, 상복처럼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장총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녀는 이미 죽음을 겪었다. 검소하게 틀어올린 머리가 남편을 잃었음을 뜻한다. 이제는 그녀가 일어설 시간, 용기 있는 이는 그럼에도 싸움을 잃지 않는다. 오른손에 굳게 잡은 장총은 뾰족하니 하늘로 솟는다. 왼손은 저 멀리 하늘을 향한다. 몽발리엥(Mont Valérien)으로 떠나가는 열기구를 안전히 보내듯이. 그곳은 철벽의 요새다. 저 아래로 멀리 전장이 보인다. 대포와 천막이 보인다. 지금은 전쟁의 한가운데다. 언제나 익숙했던 발레리안 언덕이 희미하니 잘 보이지 않는다. 저 열기구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저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도움의 손길이 찾아올 수 있을까. 여자가 보낸 메시지는 어떤 내용일까, 화가는 액자 프레임에 정답을 새겨 넣었다. “포위당한 파리는 프랑스의 호소를 하늘에 맡기노라.”
작품의 후속편과 같은 「비둘기」는 어떠한가, 여자는 포악한 매의 위협에서 비둘기를 구출하고 꼭 껴안는다. 분명 철벽의 몽발리엥에서 날아온 소식이 새에게 있을 것이다. 슬픈 표정이 메시지의 내용을 짐작하게 한다. 이건 분명 애도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시테 섬(île de la Cité), 파리의 심장이다. 하얀 눈으로 덮인 이 섬은 혹독한 겨울을 비춘다. 추위와 고립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포위된 도시가 바로 이곳, 파리다.
「기구」는 발표되자마자 프랑스인의 가슴을 불태운다. 친구 판화가 에밀 베르니에(Emile Vernier)의 도움으로 판화화된 덕분이었다. 각종 신문은 「기구」를 싣고 위로를 전했다. 간절한 도움의 메시지가 필요한 이들은 어디에나 있었던 것이다. 한편 「비둘기」를 맡은 것은 버니에(Vernier)였다. 이 석판화 역시 찬사로 둘러싸였다.
피에르 퓌비 드샤반(Pierre Puvis de Chavannes, 1824~1898)은 상징주의의 핵심을 꿰뚫는 작가다. 상징주의란 감각보다는 이성을, 무엇보다 시간을 쓰게 하는 그림이다. 저 이미지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생각하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만의 의미를 구상하게 하는 그림이다. 그는 그중에서도 마음을 꿰뚫는 감동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드샤반은 1824년 리옹에서 광산기술자의 아들로 출생했으며 처음에는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지 않다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앙리 세페르(Henry Scheffer)의 화실에 들어가 그림을 시작한다. 나중에는 토마 쿠튀르와 외젠 들라크루아에게서 배웠다. 그는 파리 시청과 소르본느 대학을 포함한 대규모 건물에 큰 벽화를 그리면서 미술계에 자리 잡았다. 드샤반은 문학적이고 종교적인 주제에 끌렸다. 옛 아름다움과 향수를 느끼게 하는 주제와 이미지를 발탁하여, 고전이 가진 변함없는 상징을 정지된 듯 그림에 담았다. 연약하면서도 투명한 색감, 나른하면서도 경직된 납작한 육체, 계산된 구도로 연출된 평면적 화면이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상징을 담은 이미지를 불합리하게 배치했으며, 색채와 형상에서 시적인 정취가 배어 나와 상징주의 문학가들을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19세기를 풍미하던 아카데미풍과 인상주의, 당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드샤반은 곧이어 등장하는 상징주의의 대표 화가로 추대되었고 조르주 쇠라, 피에르 오귀스트 느누아르, 폴 고갱, 조르주 쇠라, 모리스 드니, 마티스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드샤반에게 ‘그리다 만 그림 같다’는 이유로 엄청난 혹평을 안겨주었던 「가난한 어부」는 청색시대와 장미시대에 돌입하는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샤를 보들레르와 테오필 고티에 등 문학가에게도 큰 감화를 주었음에 물론이다.
화가는 독보적이었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아직까지 그의 이름을 높이 기린다. 그가 공동 설립자로 활약한 프랑스 국립미술협회(National Society of French Artist)에서는 ‘퓌비 드샤반 상’을 제정하여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가에게 주고 있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또 하나의 드샤반을 기대하는 것이다.
1973년경, 화가는 이 연작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다. 1871년 미국 시카고 화재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려 뉴욕 로터리 클럽이 개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그림이야말로 희생된 이들을 돕기 위해 적절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애착이란 그리 간단하지 않은 법, 1887년 뒤랑-뤼엘 갤러리(Durand-Ruel Gallery)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이 그림의 사진 카피를 전시하면서 이 그림을 얼마나 애정했는지 숨기지 않았다.
전쟁은 희망을 살해한다. 그러나 어디 전쟁뿐인가, 목숨이 거니는 생의 좁은 길에는 내딛는 곳마다 희망을 위협하는 일들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희망은 손에 잡히지 않고 희귀하다. 그래서 우리는 수이 방어적이 된다. 누군가를 피하고 외면하고, 그러면서도 위험한 총검을 꽉 잡고 벌벌 떤다. 저 멀리 희망을 날려보내고 의연한 척한다. 그만 솔직하자, 하늘을 본다는 건, 이미 날려보낸 희망을 지켜본다는 건 희망에 기대고 있다는 증거다. 사실 저 발아래에는 나를 위협하는 것들이 가득한데, 희망을 붙들고 싶은데, 저 희망에 올라타고 멀리 날아가고 싶은데. 희망을 보낸 내가 이렇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실은 간절한데…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던 어느 날, 이번에도 희망은 “Yes”로 응답하지 않는다. 연약한 내 그것은 잔인한 매부리에 상처 입은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너는 피를 흘려도 아름답다. 내 품에 돌아와 주었으니 고마웁다. 내 손으로 높은 하늘로 올려보내거나 내 품에 끌어안거나 모두 내가 성심을 다하는 사랑의 방법이다. 희망이 있어도 나는 희망을 사랑하고, 희망이 없어도 나는 희망을 사랑한다. 내가 희망을 내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에도 나는 희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희망을 버린다는 것, 그건 한편으로 희망을 이해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기를 바라지 않으며 사랑하는 것,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읽어보는 것, 모든 것을 알기를 바라지 않으며 바라보는 것. 밑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마음을 쏟는 일은 아프도록 허무해 보인다. 그러나 그저 쏟아지는 마음. 그것은 충분한 이해에 다가서는 첫걸음이다. 드샤반의 그녀처럼 희망 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드샤반의 그녀처럼 잃은 희망을 소중히 여긴다. 사랑 없이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해도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니 그저 기다릴 것뿐이다. 오지 않을 사람을. 그저 사랑할 것뿐이다, 알 수 없는 무엇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