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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Oct 21. 2023

나는 *입벌글이다.

*입벌글: 입만 벌리면 글쓴다고 함.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둘러보는 취미가 있다.


언젠가부터 그 목록이 지루해졌었는데,

경제/경영 분야의 몇 권이 상위에 또아리를 튼 후로

도무지 변동이 없는 것이

변주를 좋아하는 내게는 덜 흥미로웠다.

(그 책의 저자가 부럽다.)



사람들은 삶에 직접적으로 이익이 되거나

재미로 이어지는 것들을 좋아한다.

고로, 재화나 여가를 제공해야 대중에게 선택된다는 사실을 직장으로 소속된 인터넷 회사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중들을 상대하며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 내게는 어째서 그러한 재주가 없는가.

  나도 일생에 한번쯤 대중에게 품어져보고 싶어라.

  (출세욕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예스24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나를 사로잡은 만화책 한 권이 있었다.


책의 표지에는

수염난 더벅머리 남자가 저 너머를 지긋이 바라보며

책장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 그는 책 덕후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동족은 동족을 알아본다.





<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 >

책의 제목이다.

- 어쩐지..



<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 이창현 글/유희 그림, 사계절 출판.




책 소개 페이지에는

책 내용의 일부가 마케팅을 위해서 꺼내져있었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강유원 <책과 세계>를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1> 에서 인용한 것을

내가 또 인용했다.


(이럴 때 석사 학위를 받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출처 표기를 잘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본업으로

인공지능을 제품화 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대중에게 수요 없는 (인공지능) 공급을 들이미는 것에 이골이 날대로 난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책과 글마저

그런 지경이라는 것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 지독한 헛똑똑이구나.

나는 내게 일침했다.



소화되지 못하는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서

멋진 단어나 수단들로 반질반질 포장하는 기색이

예쁜 접시만 잔뜩 모은 재주없는 주방장 같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긴 글을 뻗어내지도 못하면서,

반드시 글을 고집하는 것은 우아하고 싶다는 몸부림이 아닌가?


나는 내가 소설을 1화밖에 못쓰는 사람이란 것을 진작에 알게 되었다.

소설 쓰기 모임이나 강좌에 들어가거나

‘꾸준히 써보기’ 같은 희망적인 실천들을 해보았지만

내가 가진 능력은 솔직하게 생각을 까발리는 형태의 글 밖에 없었다. (예시: 지금 쓰는 글.)


그러나 나는 으레 작가라 하면,

소설로 등단을 하여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은 작가가 된 다음에,

그들의 사적인 생각들(에세이)에 귀기울여지는 것이

이상적인 루트라고 생각했다.



- 욕심이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그만한 그릇이 못되는 사람이고,

또 생활인으로의 본인도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아홉 해를 희망했는데, 지금 이런 수준이라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나는 진짜 ‘작가’가 되고 싶은지

내게 솔직한 마음을 심문했다.


내가 하고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발라내었다.

그것이 나의 모양이었다.


나는 글을 할 만큼

읽음이나 씀의 깊이가 깊지도 못한 사람이다.

- 내가 하고 싶은 일의 본질은,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다.

비로소 후련해졌다.



결국 "세상에 대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 쯤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서술이었다.



전생에 망한 사이비종교의 교주였을까?

왜이렇게 세상에 대고 하고싶은 말이 많은지..

데리고 살기 참 피곤한 자아라고 한번 더 생각했다.

그리고 기어코 나는 결단을 내렸다.




< 블로그 서로이웃공개 일기장 원문 >


나는 *입벌글이다.

*입벌글: "입벌구; 입만 벌리면 구라"를 오마주했다. "입반 벌리면 글쓴다고 함." 의 줄임말이다.

이럴 바에야 입벌글을 실천하자.




내가 카메라를 켜고

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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