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 특집_하마터면 겨울마다 아이스커피를 마실 뻔했다
인류는 불을 발견하고
따뜻함은 보온병이 지켰다
따뜻한 카페라떼를 테이크 아웃하고 칼바람 부는 거리를 걷는다. 핫팩처럼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더니 어느새 10분이 지났다. 드디어 뚜껑을 열었다. 엥? 뭐야. 내 따뜻한 라떼가 아이스가 되어버렸잖아! 이러다간 얼음도 추가되겠는데?
찬바람이 불어도 커피를 따뜻하게 마실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현대 과학이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닐까(다른 숙제가 많다). 물론 이미 답은 나와있다. 오늘은 따.아(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따뜻하게 즐길 수 있게 만들어준 위대한 보온병에 대한 이야기다.
보온병의 역사. 그것은 1892년,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듀어(James Dewar)에서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그는 병에 따.아가 아닌 산소를 담고 싶었다. 이게 무슨 질소과자 같은 소리냐고? 어쨌건 그는 산소를 액체로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문제는 보관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온도가 조금이라도 변하면 밤새 만들어둔 액체산소가 한순간에 기체로 변해버렸던 것. 제멋대로 눌리는 crtl+z 같은 것이라니.
듀어는 홧김에 샷건, 아니 모든 과학지식을 동원해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병을 만든다. 유리로 된 플라스크 두 개를 겹치고, 그 사이의 공기를 없애 진공상태로 만들면 액체의 온도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듀어병(Dewar Flask)', 최초의 진공병의 탄생이다.
듀어병은 실험실에서 쓰는 용도였다. 하지만 듀어가 고용한 라인홀트 부르거(Reinhold Burger)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듀어병에 산소 대신 커피나 찌개를 담기로 한 것이다. 그는 디자인을 평범한 병의 형태로 바꾸고, 공모를 통해 열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rme’에서 따온 ‘써모스’라는 이름을 붙여 세상에 출시한다. 보온병(thermos)의 탄생이다. 이제 돈을 쓸어 담는 일만 남았다고!
부르거의 기대와 달리 사람들은 보온병에 관심이 없었다. 일단 가격이 비쌌고, 크게 필요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전쟁이 터졌다.
2차 세계대전.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은 어떻게 밥을 먹을까? 그나마 육지의 병사들은 음식을 데워 먹을 수도 있고 수급도 가능했지만, 하늘을 나는 군인이 문제였다. B-17 같은 폭격기가 점심시간마다 착륙을 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그러다간 기름값 폭격을 맞을지도 몰랐다.
이때 스탠리, 써모스 등 튼튼한 보온병이 군용품으로 채택되었다. 보온병 가득 든든한 물과 식사를 싣고 하늘을 날았다. 덕분에 군인들은 수천 피트 상공에서도 따뜻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땅에서는 의무병이 보온병을 들고 열심히 뛰었다. 대신 그 안에는 혈액이나 약품이 들어있었다. 아이스박스가 없던 시절. 보온병이 온도를 유지시켜준 덕분에 상하거나 썩지 않고 안전하게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일종의 119 구급상자 같은 역할이랄까? 보온병은 커피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었다.
전쟁이 끝이 났다. 이제 사람들은 집안에서 언제든지 따뜻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전기포트, 정수기의 등장으로 손가락만 까딱하면 온수가 콸콸 쏟아지는 시대. 특히나 집순이, 집돌이에게는 보온병은 어느새 잊혀져가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야외라면 어떨까?
사람들은 생존이 아닌 취미로 극한의 자연 속으로 떠났다. 여행, 낚시 등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는 그들에게는 여전히 보온병이 필요했던 것이다. 남극으로 떠나는 탐험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는 등반가의 손에 보온병이 들렸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극지에서도 보온병에 담아 간 커피만은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다. 인류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보온병이 한몫했던 것이다. 보온병이 없었으면 물이 꽝꽝 얼어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을 거란 말이지.
특히 한국에서는 등산객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 산 정상에서 보온병에 담긴 물을 부어 만든 컵라면 맛은 잊을 수 없다고.
코로나는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왔다. 바이러스 때문에 개인 컵 사용이 중요해지자 보온병의 관심도가 높아진 것이다. 2020 F/W 컬렉션에서는 전용 텀블러 가방이 등장했고, 프라다는 59만 원짜리 보온병을 내놓았다. 현대인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멋진 디자인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곧 기능인 시대랄까? 귀에 꽂는 에어팟이 하나의 패션템이 되었듯, 보온병은 그 자체로 힙하고 쿨한 패션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130년 전 실험실에서 시작된 보온병은 이제 산과 바다를 넘어 런웨이로 간다. 세상 어디서든 처음의 온도를 끝까지 지켜주는 역할만은 그대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는 동안 보온병은 여전히 처음처럼 따뜻한 커피를 따뜻하게, 차가운 커피를 차갑게 지켜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