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제 아침부터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힘든 것만 같았던 첫 번째 회사였다. 뭐든지 느리고 쉽게 하는 법이 없던 나였다. 그래서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하고 덮어버린 후 다시 열어볼 용기가 없었다.
"공대여자는 지금 용기를 내서 지난 일들을 정리하는 중인 것 같아" 친구가 말했다. 나는 사실 용기는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나는 "그냥, 왠지 이번에도 다시 한번 도망치고 싶을 것 같아서. 그래서 일단 그냥 뭐라도 하기 시작한 것 같아."했다.
그렇게 질끈 눈 감고 덮개를 다시 열었다. 소소하니 나무로 된 기억 상자였다. 성글게만 남아있던 기억을 한쪽 모서리로 조심스레 쓸어 담기 시작했다. 빗자루로는 쓸지 못할 소소함이라 손을 이용했을 뿐이다. 가시가 손에 박히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14날에 걸쳐 쓸다가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또 쓸다가를 반복했다.
그날들이 지나고 지금 기억 상자를 다시 내려다보니 기억들이 한쪽 모서리를 차고 넘쳤다. 두 모서리를 지나 세 꼭지를 채우고도 남아 네 면에 가득 찼다.
가시가 나를 헤치지 않을까 겁을 잔뜩 쥐고 조심스레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낸 후였다. 손은 그전보다 더 보송한 분홍빛이었고 나무상자의 기억들은 꼼꼼하게 제 자리를 찾아 앉아있었다.
그렇게 나무상자를 정리하면서 하나하나 펼쳐본 기억들이 내가 겁먹었던 것만큼 아픈 것들만 있던 게 아니라 몹시 놀랐다. 시시하기도 했다.
이제 첫 상자를 덮고 다음 상자를 열어야 한다. 첫 상자 속에서 마주한 뜻밖의 소소함과 행복함에 뚜껑을 들고 한참을 머뭇거린다.
더 정리해볼까 다시 한번 엎질러볼까. 다시 눈을 질끈 감기 전에 다시 생각한다. 나는 왜 덮개를 덮어버렸을까.
퇴사할 때 그즈음의 막막함과 불행 그리고 우울함이 다시 떠오르는 것만 같아 내내 침울해진다.
남들에게 괜찮은 일들이 나에게는 왜 괜찮지 않은지 궁금했다. 당연한 일들이 나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사는 이들이 오히려 부러웠다.
고민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후회스러웠다.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준다고 해도 다시 돌아가도 싶지 않은 날들이다.
나는 그렇게 바쁘게 결정하고 정신없이 덮어버린 것 같다.
29살, 퇴사를 결정하기까지 딱 1년을 썼다. 28살 5월 그즈음부터 회식해도 토익 예상 문제를 몇 개라도 풀고 자려고 했다. 야근하고 집에 와서도 그랬다. 점심을 먹고 휴게실로 가서 도둑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힘들게 들어온 회사니, 4계절은 더 보내봐야지 했다.
일은 나의 기분을 봐주지 않았다. 사정은 필요 없이 예기치 못한 일들이 순서 없이 밀어닥쳤다.
평소 수도나 댐 등의 토목 시설은 있는 듯 없는 듯해야 한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수도관은 자꾸 터져서 긴급보수로 자주 밤을 새웠다. 지진은 부쩍 자주 진도 4.0 이상으로 발생했고 전국의 모든 시설 관리자들은 각자의 현장에 모여야 했다. 주말이건 밤이건 명절이건 2시간 이내에 출동 가능한 곳에 있어야 했다.
밤을 새운 다음날 집에 보내주질 않아 꼬박 업무를 보는데 회식에 가자고 하는 상사와 일해야 했다. 그는 자주 소리 지르고 화를 냈다. 부서장은 승진 욕심에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예상치 못 하는 일들을 소화해나갔다. 퇴사를 처음 마음먹었던 봄이 다시 왔다. 온 나라가 슬퍼하는 그 일이 있던 4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위기 대응 관련 업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와 함께 나도 폭발해버렸다.
어디 합격해놓고 옮기는 사람은 있지만, 너처럼 아무 대책 없이 나가는 사람은 못 봤다고 했다. 다들 나의 퇴사 이면에 어떤 다른 사건들이 있었는지 동기들을 통해 둘러둘러 물어왔다. 나는 단호했고 번복하지 않았다.
처음 마음을 먹었던 그 5월로 떠올려보니 "내가 사장이 되면 직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선배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딱 그때 나에게 성찰의 시간이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당시의 나는 겉으로 과하게 에너지가 넘쳤고, 밝았다. 당연히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옷깃이라도 한번 스친 사람의 일이라도 장례식장에 가서 혼자 육개장을 먹고 왔다.
그 세상이 나의 모든 것인 줄 알았고 "뼈를 묻어야죠. 저 공대 여자(내 이름)예요." 했다. 나는 내가 내 일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조직문화의 일환으로 '일과 가정의 양립'이 유행했다. 우리 회사에서도 '대세감'을 따르기 위해서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토크콘서트를 준비했다. 신청자를 받았고, 나는 우연히 그 교육에 참석하게 되었다.
토크콘서트가 시작되었고 여러 부서에서 모인 6명의 기혼 여성 선배들이 단상에 올라가 있었다. 순서대로 본인의 회사 생활과 가정생활이 어떤지를 브리핑했다. 그리고 나름의 방법이나 조언을 나누었다.
3번째 정도로 기억한다. 발언 차례가 된 선배는 담담하게 본인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남편도 본인도 여러 지역을 주기적으로 옮겨 다니며 일한다고 했다. 부부는 다른 지역의 사택에서 따로 생활하고 아이들은 조부모님 댁에서 주중을 보낸다고 했다.
금요일 밤이 되면 그들은 제4의 집인 주말 집에서 재회한다. 그렇게 2박 3일여를 보내면서 티브이 한번 켜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보는 걸로 주말을 채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선배는 이야기 중간에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마음이 아팠고 놀랐다. 놀랍게도 선배를 위로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할까 봐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날부로 퇴사에 예열하기 시작했다. 셈을 해보았고 용기를 되짚어보았다. 그렇게 혼자 4계절을 지냈다.
내가 폭발해버린 그해 5월, 내가 결정한 내용을 엄마에게 처음 통보했다. 엄마는 믿고 싶지 않아 했다.
"6살 미술학원 다닐 때부터 너는 가방도 혼자 쌌어야."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말했다. 그 이후로도 빠르진 않지만 성실하게 살았던 것 같다. 다 커서는"내 옆에 있어 주련" 하는 엄마의 말에 차고 넘치는 성적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고 그 지역 대학에 갔다.
"그렇게 됐어 엄마. 앉아있으면 계속 눈물이 나고 숨이 막히고 자꾸 화가 나. 당장 내일 무슨 일이 또 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하니까 너무 힘들어."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마음을 제대로 마주 본 것 같았다.
"너 우울증이구나." 오랜 우울증을 겪어왔던 엄마가 말했다. "그래. 알겠어. 그만둬. 엄마가 몰라줘서 미안해." 우울이 우울을 알아봤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드릴 말씀 있다고 상사를 뒤뜰로 모셔와서 특별한 미사여구 없이 말했다. 핑계도 변명도 없었다.
"응? 뭐라고? 공대 여자 나이 29 아닌가? 어디 가게? 뭐 다른 거 할 수 있겠어? 대학원이라도 회사 지원받아서 가거나 뭐 그런 건 어때?" 상사 놈이 밉게도 말했다. "아닙니다. 퇴사하겠습니다." 일단 알았으니 부서장한테도 상의해보자고 한다.
부서장은 승진이 코앞인데 멀쩡한 여직원이 그만두는 걸 당연히 원치 않았다. 배포도 크지 않아 퇴사하겠다는 직원에게 일주일 쉬어보겠냐고 달래다가 주말 포함 5일만 휴가 내면 되겠지? 한다.
나는 일주일 쉬었다가 다시 출근하는 날 오전 바로 올라가서 잘 다녀왔습니다. 퇴사하겠습니다. 했다. 그때 부서장의 표정이 지금도 생각나서 웃음이 난다. 그 통쾌함이란.
그해 10월 유급병가와 남아있던 연차까지 야무지게 쓰고 퇴사했다.
3년 후, 첫 회사 친한 여자 동기한테 전화가 왔다.
동기 : 공대 여자야 너랑 같이 일했던 그 상사 있잖아. 이번에 같은 부서에서 만났는데 자기 덕분에 네가 좋은 직장으로 이직했다던데? 공대여자 : 그분의 공이 크긴 했지. 틀린 말은 아니네.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