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함이 뭐예요?
못 들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한강의 기적',
불과 50년 전쯤인 1970년 초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의 경제 수준은 북한과 다를 바 없었고, 미국을 비롯한 나라에서 원조를 받아서 국가운영을 하는 가난한 나라였다. 그러나 그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지금은 전 세계에 몇 위쯤 되네 어쩌네 자랑삼아 얘기할만한 국가가 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누군가는 대대손손 먹고살아도 남을 만큼 큰돈을 벌고, 누군가는 도태되었다. 시대가 바뀌든 말든 시골 깊숙한 어딘가에서 몇 백 평 땅에 농사를 계속 지었던 사람은 그야말로 싸구려 땅만 가진 실업자가 되고, 눈치 빠르게 서울 금싸라기 땅을 사놓은 사람들은 몇 년 만에 수백억도 벌게 됐다. 땅이나 건물 같은 부동산뿐이 아니라 모든 일이 그랬다. 사업을 하는 것도 정치를 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였다. 불법이고 나발이고 물불 안 가리고 성공을 위해 달리는 사람들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는 주어졌다.
개인적으로 그 시절 '성장이라는 파도'를 타고 성공을 이뤘던 사람들을 잘 대변하는 영화가 '범죄와의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최민식이 연기한 최익현이라는 인물은 정말이지 너무나 상징적이다.
'너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든지 해라.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그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확장해 줄 수 있는 사람,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골라 시쳇말로 밀어주고 땡겨주며 세력을 넓혀갔고 그 사람들은 보통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엮여있는 흔히 '인맥(人脈)'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성장 초기에는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혹은 부자가 되지 못한 이유를 스스로에게만 찾는 순수한 사람들이 많았다. 불철주야 야근하고 열심히 살면 내 인생도 달라지겠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시대가 조금 지나고 더 사람들은 깨달았다. 그 이유가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봤자 내 삶은 그대로고, 저 건넛집 아저씨는 신축 아파트 단지 건설 소장이라는 것을 한자리하더니 바로 강남에 집을 사서 이사를 가는 것을 눈앞에 보게 되니 우라가 치밀고, 세상에 대한 분노가 쌓인다. '망할 놈의 세상!'
경상도 대통령이 되면 경상도가 발전하고, 집안에 한 명만 판검사가 나와도 온 집안이 일어서고, 좋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나오면 선후배가 밀어주고 땡겨주고 하면서 한 자리씩 하는 세상. 어딘가 공정하지 못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한국사람들은 '공정한 사회'를 만들자고 외치기 시작한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인정받는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그 이후 꽤나 공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웬만한 회사들은 해마다 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을 뽑고, 국가에서 관여하는 일은 대부분은 'e나라도움(https://www.bojo.go.kr/bojo.do)'을 비롯한 온갖 사이트에 공지가 뜬다. 가수가 되고 싶으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면 되고, 배우가 되고 싶으면 배우 오디션을 보러 가면 된다. 티브이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훌륭한 아나운서도 뽑고, 댄서도 뽑는다. 만약 어떤 기관이나 단체가 담당자 마음대로 사람들을 뽑았다가는 난리가 난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자리라면 '낙하산'이나 '인맥', '비리'같은 단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이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은 한국 기준으로 보면 '불공정 사회'다.
독일의 채용방식은 주로 인맥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맥은 한국에서 꽤 부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는 단어지만 영어로 하면 네트워크(Network) 아닌가. 독일어로는 좀 더 네거티브한 비타민B(Vitamin B) - 관계라는 뜻의 단어 베찌훙(Beziehung)의 이니셜을 이용해서 만든 단어-도 있다. 한국말로 굳이 해석하자면 비타민 같이 좋은 관계(?) 정도가 된다.
독일은 한국처럼 공정한 경쟁을 위해 비행기 뜨는 시간까지 조정하면서 수능을 보지도 않고, 대학교 졸업시기에 맞춰 대대적인 취업 시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무슨 좋은 자리가 났다고 대대적인 광고를 하는 공채를 하지도 않는다. 가끔 필요에 의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모집 공고를 내는 일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처럼 흔한 일도 아니고, 그런 거 안 한다고 기업이나 공공기관 단체가 사회적 지탄을 받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만약 회사에 어떤 자리가 공석이고 사람을 뽑기 원한다면, 담당자가 그냥 알아서 뽑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 규모에 따라 여러 사람이 면접을 보고 점수도 주고, 때로는 사장 면접까지 가는 일도 당연히 있다. 하지만 최초의 기회, 그 경쟁풀에 들어가는 사람은 '알음알음 아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새로운 마케팅 매니저를 뽑는다면 일단 관련 업무를 하는 동료나 지인들에게 추천을 받을 수도 있고, 내가 실제로 아는 괜찮은 친구가 있다면 지원해 보라고 알려준다.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지원자와 함께 일해봤고 좋은 평가를 한다면 그리고 강력하게 추천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꽤나 영향력이 있는 후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작은 단체나 주니어 자리를 뽑는다면 추천한 사람 한두 명만 두고 면접보고 바로 뽑을 수도 있다.
독일 인맥사회 vs 한국 공정사회
물론 독일은 한국처럼 물리적 인구 밀집도가 높지 않고, 심리적 관계망 또한 훨씬 간격이 넓다. 정보의 확산 역시 한국처럼 빠르고 넓게 되기 힘들며, 개인의 관심도 역시 너무 다양해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모집이 비효율적일 확률이 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회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방식'의 장단점과 그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지를 좀 더 알아보자.
인맥을 통해 기회를 주는 방법은 이미 믿을 만한 추천인, 그리고 함께한 경험을 통해 증명된 사람을 뽑기 때문에 생판 모르는 사람을 채용하는 것보다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사회적 비용이다.
전국적으로 광고를 내고 몇 배수의 사람들의 서류를 검토하고, 면접을 보고, 또 면접을 보고, 또 회의를 하고. 때에 따라 교통비 명목으로 지원자에게 돈을 줄 때도 있다. 이것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자본과 에너지를 쓰는 일이다.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는 '숨겨진 보물을 찾는다'에서 온 것이 아니다. 어차피 들이는 자본과 에너지로 방송을 만들면 그 안에 생기는 스토리와 스타들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고, 이후 그 사람들이 활동할 때 어머어마한 홍보비를 아낄 수 있다는 결론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은 전 국민이 함께 경쟁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위에도 살짝 언급했듯이,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원할만큼 대단한 자리가 아니라면, 혹은 많은 돈을 버는 자리가 아니라면, 아직도 추천받고 지인 통해서 채용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례로 예술가가 함께 작업할 다른 예술가를 찾을 때 모집 공고를 내는 일은 극히 드물다. 내가 아는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지인에게 물어보고 추천받기도 하고, 내가 만나봐서 괜찮으면 같이 하는 것이다. 아무도 거기에 토를 달거나 인사비리 타령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이 만약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르다. 내가 그 예술가를 찾아서 하는 일이 위의 경우와 다를 게 없으나 기관에서 10억짜리 지원을 받는 작업이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작업을 통해 돈을 벌거나 명예를 쌓을 수 있으면 절대 내 마음대로 뽑을 수가 없게 된다.
예술의 예가 공감대가 약하다면 일반 채용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높은 자리일수록, 돈을 잘 버는 일일수록 더 공정한 경쟁을 하지 않으면 사회적 공분을 살 수도 있다. 그 자리가 추후에 만들어 낼 가치가 너무 크다. 그런데 '아는 사람'을 그 자리에 뽑는다?! 한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가치가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는데 갖지 못해 화가 나는 사람도 있겠고, 내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가치에 가장 합당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은 개개인의 삶이나 세상이 뭔가 더 완벽하고 이치에 맞게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한국은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훨씬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성공하고 돈 많이 버는 일에 목숨 걸고 경쟁하는 삶을 산다. 저 좋은 자리를 누군가가 '실력이 아닌 어떤 것'을 통해 얻었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사람들은 그런 것에 비교적 관심이 덜 하다. 남들이 어떻게 저 자리에 갔고 어떻게 돈을 벌어서 저렇게 사는지 크게 관심이 없다.(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심이 없는 '척' 하는 문화도 한몫한다.) 독일은 사회구조적으로 그런 일들이 어디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기도 힘들고, 개개인의 관심사가 너무너무 다르다. 그리고 보통 내가 좋아하는 일 이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또 독일은 개인의 삶이라는 것이 완벽하지도 않고, 이유와 결과가 이치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회다. 또 가끔 그들을 보면 '원래 세상은 공정하지 않아'라는 것을 몸으로 인정하고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또 한 가지 한국에서 인맥을 통한 채용이 힘든 이유는,
한국에서는 축구를 하면 공을 잘 차는 것, 축구 경기에서 보여줄 수 있는 능력만이 '진정한 능력'이고, 사업을 하면 장사를 잘하는 것, 강의를 하면 가르치는 능력, 건축을 하면 집을 짓는 능력만이 '진짜 실력'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다르다. 아무리 똑똑한 학생이 있어도 교실에서 손들고 발표하는 횟수가 적으면 점수를 받기가 힘들다. 한국처럼 '쟤는 조용히 있지만 답을 다 알 거야'라는 인정 따위는 없다. 당신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나 정도면 알아봐 주겠지'하는 마음으로 한걸음 물러나 있다면 아무도 당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그 판에 뛰어들고 인맥을 만들고 연락하고, 생일도 챙기고, 선물도 챙기도 하면서 내 영역을 넓혀가는 일이 중요한 능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그래서 로비스트(Lobbyst)라는 역할이라던가 사교계, 카르텔이라는 것도 다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무엇이 더 나은지, 무엇이 실제로 더 공정한 방법인가는 논하는 것 의미가 없다. 두 가지 모두 장단점이 있고, 부작용은 늘 존재한다. 유럽사회는 더 적은 경쟁을 통해 행복한 개인의 삶이 보장되었지만 그 덕에 누군가는 더 쉽게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한국은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욕심을 갖고 살다 보니 개인의 삶이 더 빡빡하고 힘들어졌지만, 어마어마한 사회적 비용을 감내하면서라도 '좋은 기회'라는 것이 감시되고 열려있다는 점.
그 이후에는 개인의 선택만 중요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