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만 앉아 쉬다 가세요
<3분 소설 - 연애의 합의>
소희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미 민하는 집에 가고 난 뒤였다.
약속시간은 5시 30분
지금 소희의 손목시계가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6시 17분
헛웃음이 나면서 느껴지는 어이없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민하는 정확히 소희를 47분을 기다렸다.
누구의 잘못인가?
그거 하나 기다리지 못한 민하가 쪼잔한 것인가? 아니면 기다리지 않은 것에 혀를 차는 소희의 잘못인 것일까?
연애의 합의
소희는 일단 카톡을 보냈다.
-어디야?-
민하는 곧장 답장을 보냈다.
-버스정류장-
-ㅋㅋㅋ집에 가려고?-
-엉 집에 가려고-
-오늘 데이트는? 나 왔는데?-
-친구 만나라. 몇 번째냐 이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
-지금 진짜 짜증 나니깐 나중에 연락할게-
-아 그냥 하지 마-
여기서 대화가 끊겼다.
둘은 끓어오르는 숨을 겨우겨우 고르고 있었고 각자 서있는 위치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민하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소희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들의 연애는 200일 정도.
순탄했지만 잔잔한 유리조각들이 많았다.
맞지 않은 건 합의로 메워갔다.
설사 균열이 생긴다 해도 둘은 합의를 통해 감정의 무너짐을 막았다.
합의는 뭔가?
한 명이 희생하는 것? 아니다.
합의는 서로가 서로에게 한발 짝을 빼는 것. 서로를 위해. 서로에게 양보하는 것.
이것이 문제였다.
양보란 한 명으로 족하다. 그래야 배려의 느낌과 양보의 미덕을 서로가 느낄 수 있다.
서로에게 양보를 한다면 그것은 즉, 두개의 기대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 이제는 절대 늦지 않을게."
"응. 나는 조금 늦어도 참고 기다릴게. 대신 연락만 해."
"당연하지~"
사람은 간사하고 안일하다. 연애라고 그런 거 없겠는가?
소희는 약속시간에 느긋이 대하는 게 습관이었고 자기 잘못에 맞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민하는 소희를 기다리는 게 당연한 일이 돼버렸고 그에 대한 불만은 어느 날 문득 생겨났다.
당연하면 안 되는 것이기에 소희에게 화를 냈다.
그것에 대해 소희는 불투명한 사과를 했다. 그때 소희의 사과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기에 민하에겐 안일한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첩첩산중 쌓여간다. 유리조각도 모이면 뾰족한 날이 되는 법
그것을 손에 쥔 채 민하는 오늘 카페를 나선 것이다.
분명 그렇게 합의를 봤건만.. 도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소희가 늦은 건 예쁘게 꾸미기 위해.
거울을 백번 천 번 봐도 민하한테 예뻐 보이지 않으면 머리 형태를 바꾸고 옷을 갈아입는다.
오늘 소희는 너무 예쁘다. 하지만 시간은 이미 늦어있었고 부랴부랴 집을 나서고 택시에 올라탔다.
허겁지겁 택시에서 "금방 갈게"라는 톡을 보내고 다시 화장을 고쳤다.
차가 막힌 건 그녀 탓이 아니잖아? 막힌 도로를 보며 발을 동동 굴러보아도 이미 늦은 건 늦은 거다.
그렇게 택시에서 내려 열심히 뛰었다.
근데... 약속 장소에 남자친구가 없다.
여자의 촉으론 바로 알아차린다. 분명 열이 받아 집에 갔을 거라고.
그래도 이렇게 집에 가버리면 나랑 싸우는 것 밖에 더 돼?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 것도 모르면서..
민하는 분명 기다릴 마음이 있었다.
근데 성의 없는 톡 하나가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고 그걸로 전화도 먼저 하지 않는 상황까지 돼버렸다.
언제까지 안 오나 궁금했던 것이다. 늦었으면 전화라도 해줄 것이지.
당연히 소희는 이러이러해서 전화도 못했고 늦었다고 애교스럽게 팔짱을 끼며 민하에게 말했을 것이다.
근데 이번은 달랐다. 정말이지 한 두 번도 아니고 끓어오르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만나더라도 기분 좋게 인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교를 부렸어도 기분을 풀지 못했을게 분명하다.
민하는 이런 상황에 어느샌가 지쳐버렸으니까.
소희는 카페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누구의 잘못인가?라는 생각을 떠나 헤어져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하는 버스정류장에서 수 십 대의 버스를 지나쳐 보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전화가 와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연애의 합의는 이렇게 무너진다.
이런 큰 상황에서 둘은 어떻게 합의점을 다시 찾을 것인가?
누구 하나 양보할 생각이 없는 지금에 합의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일까?
왜 소희는 민하에게 잘못했다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이고
민하 또한 왜 소희에게 지금이라도 당장 사과해라는 말을 못 하는 것일까?
남녀관계에 자존심이란 너무나 얄팍하고 가벼운 것이라 오히려 그것들을 불연 시 여기는 경우가 더 많다.
바보들
.
한 시간이 지났다.
7시
소희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시자고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금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민하는 아직 버스정류장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
하나 있다면 지질하게 카페를 나왔던 것. 그게 잘못됐다는 건 자기도 아는 민하였다.
근데 정말 기다리는 사람의 1분은 10분과도 같은 법이다.
그리고 약속시간을 중요시 여기지 않은 것이 민하는 정말 싫었다.
그 시간 하나 맞춰오는 게 그렇게나 힘든 일인가?
주먹을 쥐고 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이지, 데이트하기 좋은 날씨다.
.
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을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어 있었다.
오늘 분위기 좋은 카페 데리고 가서 열심히 수다 떨고 맛있는 것도 사주려고 했는데...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문 밖에서 있는 민하의 모습이 보였다.
소희는 그 자리에 멈춰서 급격히 불규칙해지는 자신의 호흡을 가다듬었다.
민하는 아직 자기가 나오는 걸 못 봤다.
분명 나 때문에 왔을 텐데...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굳은 표정으로 카페를 나섰다. 종소리가 나니 자연스럽게 민하가 소희를 보게 됐다.
"아..."
"거기서 뭐해?"
민하는 속에서 진득한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집에 안 갔어?"
"어."
"나 기다린 거야?"
"어."
"휴..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야. 빨리 와."
소희가 손짓하자 민하는 소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속에서 화가 끓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집에 가기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리고 금방이고 소희가 보고 싶기도 했고.
"야. 내가 집에 간다고 한 건 잘못한 거지만 너 진짜 사과해."
"알았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안 늦는다 해놓고선 또 늦고. 늦게 왔는데 전화 한 통도 안 해주고 카톡도 성의 없이하고. 근데 나는 예쁘게 하려고 화장하고 머리 만진다고 그랬어..."
"알아."
"그래도 집에 간다고 한 건 진짜 너무했어."
"미안해.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너 안 그러기로 했는데 또 그러니깐 진짜 화났었어."
"응.. 서로 너무 감정 상했다 그치?"
"응. 솔직히 아직도 안 풀리는 게 많다. 근데 어떡해 몸이 이쪽으로 오는데."
"그래도 잘했어. 오늘 술이나 한 잔 할래?"
"그러자."
"가자, 그럼."
둘은 조심스레 손을 잡았고 말없이 거리를 걸어갔다.
아무 말이 없는 것에 어색함은 없었다.
서로의 잘잘못을 떠나 이렇게 다시 합의의 장이 열렸다는 것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니깐.
그 밖에도 많은 충돌 요소들이 있겠지만 사랑싸움은 생각보다 너무나 가벼운 것들로 시작된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사소한 게 그 사람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걸 왜 모를까?
조금이라도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연애라는 틀 안에서 마음의 크기를 조금은 줄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사람의 간단한 말을 기억해주는 것이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듣고 이행해주는 것이 곧 표현이다.
사소하잖아. 간단하고.
연애의 합의는 이렇게 다시 시작된다.
언젠가 둘의 접점이 물렁해져 서로에게 지치는 일이 생기겠지만 합의보단 한 사람의 양보가 그들의 연애에 더욱 윤기를 바르는 게 아닐까 싶다.
"미안해."
"나도 미안해."
연애의 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