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져.”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지 않고 있다.
헤어져, 라는 소리를 열 번이고 넘게 했는데 듣는 채도 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 일어나서 가 좀.”
“… …”
“아, 이래 봤자 변하는 건 하나도 없다고.”
슬슬 짜증이 솟구친다. 그냥 가버려도 되는 상황이지만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남자는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허벅지를 비비고 있다. 그 모습마저 싫증 나는 혜란이었다. 여기는 그녀의 오피스텔 앞. 지나가는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보는데도 이 남자는 벌써 2시간째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 끈기에 박수는 쳐주고 싶네.
이놈은 남자 친구다. 약 1년을 사귄. 근데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3번이나
혜란은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다. 바람을 피웠지만 가끔 여자란 사랑을 담보로 모든 걸 덮고 남자를 믿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남자는 잘못을 빌었고 혜란은 “너 다음에 또 그러면 죽어.”라고 울먹이며 그를 용서했다.
남자는 오독한 코에 길쭉한 키 그리고 구릿빛의 피부를 가진 훈남이었다.
보면 절로 미소가 흘러나온다. 밥 먹는 모습만 봐도 풋, 하고 웃음이 나왔고 입을 벌리고 자는 모습을 볼 때면 혼자 두 주먹을 말아 쥐고 꼬마 아이처럼 웃곤 했다. 근데, 잘생긴 게 얼굴 값한다고 한없이 잘해주니깐 사랑 고마운 줄 모른다.
혜란은 양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곤 입 바람을 보내 이마의 땀을 식혔다.
한두 번은 병신처럼 이해해도 지금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진짜 내가 없어져봐야 정신을 차리지.
“나 간다. 일어나서 집을 가든 여기서 계속 무릎 꿇고 있다 뒤지든 네 맘대로 해!”
뒤돌아서 발걸음에 무게를 실으며 집으로 걸어갔다. 하, 이제는 정말 끝이다. 나쁜 새끼…
“아… 잠깐만 누나!”
뒤에서 절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혜란은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또 시작이다.
사실 용서를 구하면 흔들릴 거 같아서 그냥 뻔뻔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했었다. 근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리 그래도 세 번은 너무하잖아. 삼 세 번이라는 말도 있듯이 더 이상 봐주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벌써 해놓았다.
4번째는 자신이 비참해질게 뻔하다.
일단 돌아보지 않고 대답할 여지를 주었다. 괜히 코가 찡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미쳤었지. 진짜 잘못했어… 뭐라 변명을 못하겠지만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
누나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응?”
혜란은 가슴을 끌어올려 숨을 들이마시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소리… 저번에도 해놓고선. 적어도 다른 변명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그녀는 말했다.
“하라는 대로?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 정말 다 할 거야?”
“으응! 정말 뭐든지 할게.”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다리가 저렸는지 이내 이를 악물고 깽깽이를 하며 주위를 맴돈다. 희망을 느꼈나 보다. 혜란은 뒤돌아서 거시기라도 차주고 싶었지만 뒤돌지 않는 것이 마지막 자존심이라 발가락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럼……”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남자는 몇 발자국 다가오며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당장이라도 혜란을 꼭 껴안을 태세였다.
“으응.”
“제발 내 눈 앞에서 꺼져 이 새끼야.”
통쾌하게 말하곤 혜란은 잽싸게 현관으로 걸어갔다. 남자의 표정이 궁금해 죽겠지만 이제 이걸로 저 개 같은 자식이랑은 영원히 안녕이다.
나도 이제 날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 나 놓친 거 평생 후회하면서 살아.
현관까지 들어가는 동안 그의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13층까지 올라가는데 그것은 혜란에게 참으로 가혹하고도 무거운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 느껴진 그 더럽고도 찝찝한 마음은 그녀의 발걸음을 베란다로 움직이게 했다.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니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아직까지 현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신.. 아직 안 가고 뭐해.”
매몰찼지만 금방이고 열 받은 가슴이 식어져 버린 혜란이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내려가서 끌어안아주고 싶지만 그러기엔 그녀는 너무 지쳐버렸다. 이젠 안기고 싶다. 어느 누구한테라도.
“제발, 안녕.”이라고 혼자 중얼거린 후 창문을 닫았다. 맥주를 마실까 했지만 아무래도 바로 누워버리는 게 낫겠다 싶어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렇게 자버리면 아침이 되고 나는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내게 되겠지.
.
아침이 되니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지난밤.
혜란은 깨져버린 사랑에 닭똥 같은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내 버리고 말았다. 쿨하게 뒤돌아서려고 했건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고 슬픈 건 또 슬픈 거였다.
겨우 눈을 뜨니 눈퉁이가 반탱이가 돼서 거울을 보자마자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도 출근을 해야 한다. 어제 울고 나서 마음먹은 건 자고 일어나면 원래 지냈던 것보다 더 자연스럽게 하루를 보내기로 하는 것이었다.
샤워를 한 뒤 화장을 하고 옷을 입고 출근을 했다.
어제 남자가 꿇고 있던 자리는 썩은 나뭇잎들만 자리 나뒹굴고 있었다.
그래, 저러고 집에 가서 아주 꿀잠을 잤겠지.
억지스러운 코웃음을 한번 치고 역으로 향했다.
장마가 시작하려는지 아침인데도 우중충한 날이다. 차라리 오늘은 실컷 비나 왔으면 좋겠다.
.
회사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어디서 울고 왔냐고, 추궁을 한다. 혜란은 슬픈 영화를 봤다 대충 둘러댄 후 최대한 일에 집중했다.
몇 장의 사진과 쪽지를 받은 건 점심시간 때였다.
“한혜란 씨 맞으시죠?”
배불뚝이 택배기사가 자그마한 상자를 건네며 혜란에게 말했다.
“네.”
“이거 받으시고요 여기다가 사인해주시면 됩니다.”
“아…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저기요! 혹시 근데 이거 누가 보낸 건 줄 아세요?”
주문한 것도 없는데 택배가 온건 분명 사적인 택배가 분명하다.
그럼 생각나는 사람은 딱, 한 명.
"그건 저도 모르죠. 하하하 그럼."
돌아나가는 뚱뚱이 택배기사의 등에 남자의 얼굴이 비치는 듯했다. 꺼림칙했지만 기대감은 풍선처럼 이미 부풀어 오른 혜란이었다.
책상으로 가져와 단번에 상자를 풀어헤쳤다. 몇 장의 사진은 연애의 정점을 찍었을 때 찍은 사진. 사진에서 혜란과 남자는 나체의 모습이었고 그들은 사진 안에서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일단은 주위를 둘러봤다. 이런 사진을 찍었다는 걸 주변 동료들이 보기라도 하면 이때까지 쌓은 이미지는 산산조각 날게 분명했다. 사진을 거꾸로 덮어놓고 곱게 접힌 쪽지를 펼쳤다. 쪽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나 정말 어이가 없어서.
-누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건 알지만 이젠 용서해줬으면 좋겠어. 사진의 의도는 협박이 아니야 그냥 저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서 보낸 거야. 당장 연락해줘 나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어 그러니깐 제발 이제 마음 풀고 연락해줘. 내가 정말 잘못했어.-
“협박이네…”
종이를 주먹으로 구기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틀림없이 이건 협박이다. 나체의 사진. 좋았던 시절이지만 이딴 식으로 헤어지고 난 뒤엔 그 사진은 추악한 과거가 틀림없다. 조금 더 부드러운 사진이었으면 이해했지 몰라도 이건 너무 티 나는 협박이다. 더러운 자식.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니…
순간, 이 사진들이 어딘가에 퍼지기라도 한다면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혜란은 단숨에 핸드폰을 켜고 남자의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이내 멈칫, 전화를 해서 다시 합친다면 괜찮아질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제발 이젠 현명해야 한다. 줄곧 난 병신 같은 여자였다.
일단은 전화를 하지 않기로 했다. 안색이 안 좋아졌는지 친한 동료 미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혜란아. 오늘 무슨 일 있니? 얼굴이 먹구름이다 얘."
혜란은 손으로 푸석한 얼굴을 매만지며 웃음을 지었다.
"아니, 어제 매운 걸 먹어서 그런가 배가 자꾸 아프네."
"에게 먹은 표정이 아닌데? 남자 친구랑 싸웠어?"
"아, 아니야~ 싸우긴 무슨. 그냥 생리 때라 배가 좀 아파."
사실, 지금 엿같은 상황이 돼버렸어 미란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은 혼자 감당해야 할 문제임이 분명했다. 착한 미란이는 살뜰하게 생리통 약까지 챙겨준다. 고맙기도 하지.
"생리 때는 시차 쓰고 퇴근도 하고 그래 지지배야. 아픈데 무슨 일이야."
엄마처럼 팔을 꾹꾹 누르며 잔소리를 한다.
혜란은 잘 먹을게 자기,라고 애교를 떨고 다시 일에 집중을 했다. 그래. 일단은 퇴근을 하자. 집에 가서 전화를 하든 문자를 하든. 좀 제발 얌전하게 헤어져보자.
.
집으로 와서 한참을 고민하다 혜란은 전화보다 메시지가 낫겠다는 결정을 지었다. 전화를 하면서 감정적으로 변하기가 싫었다.
맥주 2캔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베란다에 서서 메시지를 보냈다.
-이 사진의 뜻은 뭔데?-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재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이때로 돌아가자는 뜻이야. 용서해주는 거야?-
-아니 괘씸해서 도저히 용서 못하겠다. 나랑 찍은 사진 다 불태우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 너랑 엮이기 싫어-
-조금만 더 현명하게 생각해보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모티콘 없는 딱딱한 메시지를 주고받으니 다른 남자랑 연락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뭐,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 상관없지만.
아무튼 다시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은 남자의 태도였다.
-현명하게? 너 같은 새끼를 어떻게 다시 만나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사진 다 지우고 불태워 알았어?-
-정말 후회 안 해?-
-안 해 이 새끼야 몰라 니 알아서 해-
저도 모르게 욕을 해버린 그녀다. 열은 이미 머리 끝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걸려도 무슨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걸릴까? 혜란은 맥주 캔을 거세게 따며 거친 한숨을 토해냈다. 그 순간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하.. 진짜 미치겠네."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전화기를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오늘따라 벨소리가 왜 이래 크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전화를 받으면, 목소리를 들으면 과연 무슨 기분이 들까?
혜란은 맥주를 벌컥 마시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애절한 목소리였다.
"……"
"일단 한 번만 만나줘 만나면 그 자리에서 사진 다 삭제할게."
"뭐?"
"사진 다 삭제한다고… 제발…"
흔들리기에 충분한 목소리였다. 남자는 울먹거렸고 혜란은 아마에 손을 올렸다. 약간의 두통이 찾아왔다. 이건… 만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정말… 끝까지 왜 이래?
"그러니까… 왜… 잘해줄 때 모르고."
곱게 꾹꾹 눌러 접어놓았던 혜란의 마음이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으응?"
"그러니까."
"응…"
"내가… 진짜 병신 호구로 보이냐고 이 쓰레기 새끼야!!!!"
전화기를 향해 호통을 쳤다.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찌렁찌렁한 목소리가 바깥에 윙, 하고 울려 퍼졌다. 혜란은 전화기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사정없이 욕을 하고 전화기를 짓밟고 했지만 순식간에 끌어 오른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헉… 헉… 개 같은 자식."
몸부림을 치다 엄마한테 받은 귀한 난초를 깨부술 뻔했다. 깜짝 놀란 혜란은 눈을 보름달처럼 뜨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천천히 심호흡을 유지한다. 후…아… 후…아…
전화기 액정은 약간의 흠집이 났을 뿐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거기에 다시 한 번 한숨을 돌린 그녀는 전화기를 들고 남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로 인해 자신이 당하게 되는 일을 그때 혜란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퇴근을 하고 가까운 스몰비어에서 직장동료와 맥주 한 잔을 한 뒤 집으로 걸어가고 있는 혜란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흠뻑 취해있다. 신나는 바운스 리듬에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엉덩이도 살짝 흔들어주니깐 절로 신이 나 혼자 키득키득 웃는 그녀였다. 혜란은 조만간 클럽에 한 번 가야겠어,라고 생각한 뒤 자신의 오피스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다행히 그 남자는 생각나지 않는다. 억지로 생각을 안 하려는 부분도 있었지만 일단은 날 너무 빡치게 했으니까.
.
인기척을 느낀 건 노래가 끝나고 다음 노래로 넘어가는 그 작은 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