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에 발이 부딪혔는지 깡! 하는 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졌다.
혜란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 시야를 양쪽 옆으로 늘렸다.
한껏 경계를 한 탓인지 그날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워낙 예쁘고 몸매 잘 빠진 여자들이 많은 오피스텔 촌이라 저런 남자 하나쯤 있는 건 당연하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한편으론 자신에게도 어느 남자가 음흉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은 기분이 좋기도 했다.
뭐, 아직은 남자한테 먹히는 몸매니깐
.
하지만 그 음흉한 기운은 매일매일 이어졌다.
오늘부로 6일째다.
3일까지는 괜찮았는데 4일째가 되니 소름으로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고 집에 가는 발걸음이 거의 경보 수준이 되었다.
어제는 인터넷에서 치한 퇴치 호신술을 배웠다. 까무잡잡하고 입술이 두꺼운 어느 트레이너가 찍은 동영상이었는데 울긋불긋한 근육을 이용하여 건장한 남자를 쓰러트리는 게 마치 한 마리의 흑표범 같았다.
트레이너가 호신술을 쓸 때 "하합!"이라는 소리를 크게 냈는데 혜란은 그것마저도 따라 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래도 몇 가지 동작을 숙지해놓으니 마음이 놓이기도했다.
"그래 오기만 해봐.. 확 거시기를 눌러 뭉개 줄 테니까.. 하합!"
이튿날에는 직장 동료 민지가 혜란에게 몰래 호신용 너클을 선물해줬다.
귓속말로 호호 웃으며 자신은 이걸로 남자 몇 명을 죽였는지 모르겠다는 그녀는 권투선수 마냥 주먹을 쉭쉭 휘둘리곤 혜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너클은 진짜 말 그대로 무기였다. 가죽 팔찌 모양에 뾰족한 쇠가 달려있었다.
이걸로 얼굴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황천길이 그냥 눈앞에 보일 것 같았다.
좋아. 어디 한 번 날 건드려 봐. 내가 황천길 입구까지 곱게 모셔다 드릴 테니까.
등 뒤에 백만 대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이래저래 준비가 되니 진짜로 치한이 한 번 덮쳤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
그날 밤은 일부러 엉덩이를 씰룩 흔들고 가슴도 좀 더 내밀어 집 쪽으로 걸어갔다. 혜란의 덫이었다.
하지만 그날도 남자가 따라오는 느낌만 들었을 뿐. 그녀를 건드리진 않았다.
.
장마가 시작됐다.
이번 장마는 꽤 길게 이어질 거라고 기상청이 알렸다. 혜란은 비를 싫어한다.
가뜩이나 집에 가습기도 고장 났는데 비까지 와버리면 집안은 물론 기분까지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솔로잖아.
밤에 마음이 외로워 몸을 비비 꼬는 행동은 딱 질색이다.
헌팅 술집을 가볼까 했지만 가자마자 현자타임이 올게 뻔하다는 건 혜란 자기 자신도 잘 알고있었다.
퇴근을 하고 곧장 집으로 간다.
역에서 내린 후 큼지막한 장우산을 활짝 폈다. 지하철을 타기 전보다 비가 더 억세게 오는 것 같다.
구두를 신었는데 몇 발자국 걷자마자 바로 발이 젖어버렸다.
택시를 타기엔 너무 돈이 아깝다. 집까진 10분이면 충분하니깐.
사거리를 벗어나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가니 고요한 게 음산한 기운 바로 느껴졌다.
원래는 한 두 명의 사람 정돈 보이는데 비가 온 탓인지 오늘은 아무도 골목에 보이지 않았다.
순간, 매일 느꼈던 음흉한 기운이 느껴졌다.
혜란은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서고 말았다. 왜냐면 그 기운이 매우 가까이서 느껴졌기 때문.
뒤돌아 보기가 무서웠다. 가슴이 마구 떨리는 게 주체할 수 없는 공포심이 혜란의 몸을 뒤감쌌다.
하지만 일단은 걸어야 한다. 최악을 대비해 먼저 사람이 있는 쪽으로 가야 하니깐.
혜란은 괜히 기침소리를 크게 한번 내고 떨리는 발걸음을 한 발짝 두 발짝 내밀었다.
자. 흑표범의 호신술을 기억하자.. 내 등을 뒤 감싸면 몸을 밑으로 빼고 무릎 뒤를 휘감아 넘어트린다. 그래..그래..
참새 걸음으로 걸으면서 생각해보니 가방에 미진이가 준 너클이 생각났다.
아참!
가방을 여는 순간 뒤에서 검은 물체가 혜란을 덮쳤다.
"꺄아아악! 읍?!"
몸부림을 치고 소리를 질렀지만 치한의 손은 이미 혜란의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몸을 밑으로.. 몸을 밑으로!
두꺼운 입술로 호령하던 흑표범을 떠올리며 혜란은 있는 힘 껏 몸을 밑으로 내렸다.
"흐흡!"
됐다. 성공했다. 혜란은 남자의 손에서 벗어났고 이내 오른쪽 팔을 휘둘러 남자의 무릎 뒤쪽을 휘감았다.
자, 쉬벌 당겨!
"하합!"
하지만 힘이 부족했다. 남자는 그것을 잘도 버텨내고 혜란의 위를 덮쳤다.
비는 억세게 내리고 있다. 둘의 몸은 빗물에 다 젖고 말았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지고 만 것이다.
"으읍..이거 놔 시발!"
겨우 소리를 한번 질렀다. .
제발 날 좀 도와주세요.
다시 입이 막히니 점점 힘이 빠지는 혜란이었다.
다시 입이 틀어막히고 입고있던 브이넥 안쪽으로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잘도 가슴을 주물럭 거린다.
이 더러운 새끼.
최대한의 발악으로 발버둥을 쳐봤지만 무용지물 이었다. 근데 무언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하.. 힘이 점점 빠진다..
아.. 어떡해 나 몰라..
그렇게 눈을 감는순간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아악!!!"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몇 번 젓고 앞을 보니 한 여자가 한 손에 몽키스패너를 들고 혜란을 향해 웃으며 서있는 게 아닌가? 먼저 혜란은 서둘러 바닥에서 일어났다.
"후훗, 괜찮아요?"
짧은 치마, 가죽자켓, 검은색 우산 그리고 눈에 확 띄는 발렌시아가14년 콜렉션 가방. 여자는 강력한 포스가 뿜어나오는 마치 배트맨의 캣우먼 같았다.
"일단 이거 써요."
가방을 열더니 이내 접이식 우산을 하나 꺼내어준다.
"네..."
"에효, 그러니깐 미리미리 좀 준비하지. 요즘 남자 남자애들이 얼마나 힘이 쎈데요. 잠시만."
여자는 들고 있던 몽키스패너를 가방에 넣고 자그마한 스프레이를 꺼내더니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 이게 무슨 일인지.. 혜란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여자에게 의문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서 뒹굴뒹굴 거리고 있었다. 이미 온몸은 너덜너덜해진 상태다.
가슴을 이리저리 만져 브래지어를 다시 원위치 시켰다. 너무나 멍한 상태라 혜란은 받은 우산을 펴지도 못한 채 가만히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 귀여운 총각. 누나가 아무리 섹시해도 이렇게 덮치면 안되지잉~"
여자는 우산을 들고 쪼그리고앉아 남자의 얼굴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머리에서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계속 뒹굴거리는 거 보니 어지간히 아픈 것 같았다.
시팔 나도 얼굴이나 한번 보자
증오섞인 궁금 함으로 혜란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거의 다 갔을 때쯤.
"아.. 안돼!"
갑자기 남자가 바닥에서 일어나 여자를 밀치려 했다. 여자는 살짝 몸을 비틀어 남자의 손을 피하고 조금 전에 꺼내놨던 스프레이를 남자의 얼굴에 뿌렸다. 그것은 지독하게 독한 호신용 스프레이였다.
"아악!!!"
아, 뭐야 내 남자친구잖아.
"아..."
남자는 바로 그 새끼였다. 얼마 전에 헤어진 그 쓰레기 새끼. 스프레이를 맞고 오만상을 지으며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혜란은 그저 눈만 깜빡 거리고 있었다. 묵직한 비를 맞는 느낌도 어느새 사라진지 오래였다.
"응? 뭐야 그 표정은? 아는 사인가?"
여자가 아무렇지 않게 스프레이를 가방에 다시 넣으며 혜란에게 말했다.
"네."
이유모를 벅차오름에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보니깐 전 남친이네."
"네."
"그럼 쓰레기네요."
"네."
"쓰레기는 맞아야 해요."
"네?"
"쓰레기에겐 몽둥이를."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에게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무언갈 꺼내 혜란에게 건네준다. 그것은 한 손에 잡히는 연갈색의 솜방망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그런 가방에서 무슨 이런게..
의문스러움에 질문을 하려는데 여자가 말을 이었다.
"사람은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항상 준비를 해야해요. 몽키스패너는 너무 아프니 이걸로 맘껏 때려요. 사랑했던 만큼."
솜방망이를 건네주며 여자가 상큼하게 어깨를 살랑 거렸다.
참.. 이상한 여자다.
얼떨결에 방망이를 받은 혜란은 남자에게 다가갔다. 얼굴을 감싸고 비를 맞으며 차가운 콘트리트에 누워있는 내 전 남자친구. 남자도 모든 걸 체념한 듯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있는다.
"야."
가까이서 보니 전 남친인게 확실했다. 그 사실에 이제는 느낄 필요도 없는 큰 배신감이 느껴졌다.
연애할 때 아무리 좋게 섹스를 했어도 헤어지고 아무리 내 몸이 그리워도 적어도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 될 거 아냐. 내 몸이 질려서 다른 여자랑 자고 다녔던 거 아냐? 근데 이제와서 날 추행한다고? 차라리 곱게 얘길하지 그랬어요 누나랑 섹스가 너무 하고싶어요. 라고 이 더러운 새끼야.
"너도 참 가지가지 한다. 얘."
발끝으로 남자를 툭툭 건드렸다. 남자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미안해..."
"참나, 미안해?! 미안해?"
들고 있던 솜방망이로 힘껏 남자를 내리쳤다. 솜방망이지만 어느정도 아픔은 느껴졌을 거다.
혜란의 파워는 감정 그 이상을 담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숨을 참듯 흡흡 거리며 혜란에게 맞는 고통을 꾹 참아내는 듯 했다. 쯧쯧
여자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다.
"더러운 새끼! 쓰레기 같은 새끼!! 진짜 그냥 죽어버려!!"
"후후후"
"다른 여자랑 그렇게 뒹굴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지랄이야 이 나쁜 새끼야! 두 번 다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알았어?"
"......"
"미친 새끼. 변태 새끼.. 하.. 어떻게 네가.."
혜란이 힘든지 헉헉 거리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여자는 말없이 혜란의 옆으로 다가와 우산을 씌어주고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주었다.
"어째 좀 풀려요? 얼른 닦아요. 이제 사람들 오겠다."
"네.."
가만히 생각하니 이번엔 가방에서 파란색의 수건을 꺼내 줬다. 아니, 이 여자 가방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야
"그럼 일어나요 감기 걸리겠다. 호호"
"근데, 저 너무 고마운데요.. 가방에 뭐가 들어있길래 이렇게 수건까지"
"아, 원하던 질문이에요!"
여자는 살짝 윙크를 하더니 이내 가방을 혜란 쪽으로 내밀었다.
"자, 한번 들어보세요."
가방을 드니 꽤나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몽키스패너만 해도 무게가 얼만데..
꼭 꽉 찬 시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뭐가 들어있는 거예요?"
혜란이 물었다. 비에 젖어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게 마치 사춘기 소녀가 가출을 하고 비에 맞은 꼴 같았다.
"그건 비밀! 그냥 언제나 난 준비돼있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무슨.."
"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싫어해요. 근데 그쪽은 준비는 했죠. 다만 미비했을 뿐이지. 호신술, 나쁘지 않았어요."
짙은 아이라인이 그려진 눈으로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여자는 혜란의 눈에 너무나 매력적인 언니로 보였다. 분명 나보다 나이가 많겠지. 근데 이 동네 사람인가?
"아, 어쨌든 감사합니다. 근데 이 동네 사세요?"
"으으음~ 그건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다가 도와줬을 뿐이에요. 기분은 어때요?"
"이젠 괜찮아요. 덕분에 맘껏 때렸네요. 남자가 매일 따라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게 전 남자 친구인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세상에 기가 막혀서.."
"원래 가까웠던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멀어지는 법이랍니다. 이젠 멋진 남자만 만나면 되겠다."
"고마워요 언니."
"오호호 누가 언닌줄 알고~"
여자가 부축을 해줘 겨우 몸을 일으켰다. 현기증이 났지만 기분 좋은 어지러움 이었다.
남자를 쳐다보니 어느새 저기 저쪽으로 뛰어가고 있다.
으휴.. 불쌍한 새끼..
"후후 저기 도망가는 꼴좀 봐요 완전히 짓밟아 버렸어."
"그러게요. 이제 다신 얼씬도 못하겠죠?"
"그럼요 얼마나 맞았는데. 아무튼 이번 일로 나 자신도 지킬 줄 알아야 하는 걸 잘 알았죠?"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으니 여자도 같이 미소를 띤다. 내려오는 비는 한껏 강해졌다.
혜란은 여자가 건네줬던 우산을 이제야 펼쳤다.
"이 우산 잠시 빌려도 될까요? 번호라도 주시면 제가 그쪽한테 갖다 드릴게요."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검지 손가락을 번쩍 들었다.
"이 우산은 내 선물이에요. 여자는 항상 가방을 두둑이. 알겠죠?"
커다란 우산을 들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여자는 혜란에게서 멀어졌다.
멋있다. 저 여자.
혜란은 집으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자신의 어깨에 걸린 싸구려 메이커 가방을 보니 빗물에 젖어 눅눅해져 있다. 그래, 자고로 여자는 가방이 무거워야지 무시 안 당해. 당장 가방부터 사자.
고혹적인 캣우먼 같았던여자를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그대로 기절 해버려야지.
아무튼 내일은 쇼핑을 할 것이다. 앞으로 호신용으로 너클 따위 버리고 이제 이거 하나면 충분할 것 같다.
그건 바로
은빛의 몽키스패너다.
p.s
장편소설 <그녀의 가방> 중 하나의 에피소드를 가지고 왔습니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녀'죠.
너무 막힌 소설이라 이부분을 편집하면서
뒷내용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9월이 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써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