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듈럼>은 저자 바딤젤란드의 <리얼리티 트랜서핑>이란 책에 나오는 용어인데, 난 세상에 펜듈럼이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펜듈럼의 사전적 의미는 <진자 또는 시계의 흔들리는 추>이지만, 이 책에서는 집단의 사념체 또는 사람들을 어떤 목적이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로 설명한다(시계의 추, 진자의 움직임처럼 운동 에너지는 변함없이 같은 방향으로 지속된다). 즉, 정치, 언론, 미디어, 회사조직 등등 개인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펜듈럼의 기본 에너지를 장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펜듈럼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펜듈럼은 나만의 독자적인 생각과 판단을 빼앗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사람들에게 말할뿐이다. 그래서 펜둘럼은 "권위"일 수도 있다. 대상을이상화하고 권위를 부여하여 사람들이주체적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니 말이다. 펜듈럼은 정치인들의 사념 에너지일 수도 있고 편향된 기사 일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여기에 빠져들고 펜듈럼이 원하는 방향이 마치 내가 원했던 것인 양 착각을 한다.
정치인을 테러했던 한 사람이 생각난다. 정치성향을 떠나 결단코 폭력은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까? 그 역시 정치 펜듈럼에 자신을 빼앗긴 것이다. 그는 삶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지금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그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정치인 그 누구도 그를 돌봐주지 않을 테니까. 그게 펜듈럼의 보이지 않는 에너지다. 사용하고 가차 없이 버린다. 펜듈럼은 우리의 일상에도 있다. 작게는 나의 평온을 깨트리려 하는 그 무엇도 될 수도 있다. 운전 중 갑자기 끼어드는 차, 교통편의 연착, 동료의 어처구니없는 일처리, 머저리 같은 상사의 의사결정, 갑작스러운 해고통보, 지하철 옆자리의 자지러지는 아기울음소리... 생각해 보면 나의 마음과 평온을 깨트리는 것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수십 번씩 나에게 다가온다. 이전에 나는 이런 것들에게즉각적인 반응을 했다. 화 내고 짜증을 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 일도 아닌 것들이 커지고 확대되어 평온했던 나의일상을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펜듈럼에게 먹이를 준 결과였다.
펜듈럼은 에너지를 주지 않으면 사라진다. 지나간다는 말이다. 이걸 진심으로 깨닫는데 난 너무 많은 시간과 희생이 필요했다. 펜듈럼의 노예가 되느냐 아니냐는 나의 선택이었다. 집에서 TV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치자. 재미없고 망작인 드라마인 것 같다. 소파에 앉아서 소리치고 화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냥 다른 채널로 돌리면 되는 것이다. 안 보면 되는 것이다. 펜듈럼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있고 충분히 내 앞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지만 티브이 채널을 돌리듯 그곳에서 떠나거나 흘려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난 지금까지 나에게 벌어졌던 모든 일들, 내 마음과 평온을 흩트려버렸던 일들, 사람, 상황, 생각, 미디어.. 심지어 내 아이들이나 와이프까지... 크고 작은 펜듈럼이 될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일상을 방해하는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아~ 그렇구나 펜듈럼이 왔구나!라고 인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 발자국 물러나게 되고 그것을 지나가게 할 수 있다. 반응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펜듈럼이든 뭐든 상관없다. 느낌이 들면 알아차리고 한번 해 보길 바란다. 지나가고 단 몇 분만 있으면 큰 문젯거리가 될 것 같았던 일도 아무 일도 아니게 된다. 그토록 화가 났던 일도 몇 분만 지나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게 된다.
두 번째, 세상의 일은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남이 하는 일, 과거의 일, 알 수 없는 미래의 일이다.
남이 하는 생각과 일, 판단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지나간 과거 역시 바꿀 수 없다. 미래에 다가 올 일 역시 알 수 없다. 내가 오랜 시간 스트레스를 받아왔던 이유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난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밖에 더 있겠는가. 나도 날 어찌 못하는데.... 어떻게 남이 하는 생각과 행동을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겠는가. 지나간 과거의 일을 생각하고 후회해 봐야 쌀 한 톨만큼이라도 바꿀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나의 특기는 분석과 계획이었다. 우스갯소리지만 친구들이 "T발롬"이라고 부를 정도로 분석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었다(MBTI에서 ENTJ). 정밀하게 분석하고 모든 시그널에서 의미를 찾고 공통 코드를 찾아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난 좋았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삶은 무한 변수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하겠다는 나의 건방짐과 무지의 중심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된 지금, 난 어떤 것도 예측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할 수 있다면 감사하는 것. 지나간 과거의 잘못 또한 후회로 돌아보지 않는다. 남이 하는 일 또한 내려놓고 받아들인다. 어쩌겠는가.... 내가 하는 일도 제대로 안되는데.
세 번째, 가급적이면 내 인생에 모든 중요도를 낮춘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스님의 법문 같은 소리냐고 할 수 있는데.... 진짜로 이게 나이를 먹을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인간관계- 남녀 간의 연예, 배우자와의 관계, 자식과의 관계, 직장 동료와의 관계.. 내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정적이고 불균형적인 결과는 이 "집착"에서 오는 것 같다. 나의 두 번째 인생지침과도 맞닿은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잘못된 된 믿음은 집착을 만들어 낸다. 불행의 씨앗은 어쩌면 "집착"에서 생겨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의 삶에서 충분히 증명되었고... 그래서 난이 말을 받아들인다.
중요성을 낮추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은관심을 끄고 냉정해진다는 말이 아니다. 마음을 내려놓고 힘을 뺐을 때, 인생이 그 나름대로 흘러가게 놓아둘 때, 나 스스로 더 많은 것들이 채워지고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비로소 내 아내와 자식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왜 그럴까 생각 해 보았다. 비유를 하자면 이렇지 않을까? "집착"은 길가에 핀 꽃이 너무 예뻐서 그 꽃을 갖고 싶은 것이다.꽃을 꺾어 내 집 화병에 놓은 것과 같은 것이다. 반면에 "사랑"은 길가에 핀 꽃이 너무 예뻐서 그저 그대로 바라봐 주고 기뻐하는 것과 같다.사랑과 집착의 차이다.
중요도를 낮춘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아집과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다. 노력하고 최선을 다 해 하루를 살아가되 인생이 흘러가는 모습과 결과를 "받아들이고 내려놓고 맡겨버린다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의도적으로 긍정의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즉, 나쁜 상황에서 좋은 가능성 찾기, 나쁜 상황에서 긍정적인 해석하기다. 쉽지않다. 하지만 중요한 건 "습관"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건 뭐.... 그냥 긍정적이 돼라. 이 말을 하는 거잖아?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맞다. 비슷하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긍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내가 많은 시간을 들여 습관을 들이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은 나름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긍정적이 되는 것"은 습관이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이 되는 것"도 습관이다. 나는 지금까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런 반응과 모습들은 타고난 성품 또는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의 결정이고 행동을 하겠다는 결단이었다.
얼마 전 라이딩을 하다 자전거에서 떨어져 어깨를 다친 적이 있었다. 속도를 많이 내고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사람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평소 같으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었을 테고 그 사람에게 뭔가를 했을 것이다. 병원에 있을 때도 집에 왔을 때도 미친 듯 신경질이 났을 것이고 왜 도대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이지? 왜? 왜?!!! 계속 분노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전방을 보지 않았던 내 잘못도 있었고 화를 낸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지,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나중에 큰 교통사고라도 날 수 있는걸 하느님께서 미리 경고해 준 걸 수도 있잖아? 그런 큰 사고가 나면 죽을 수도 있는 거잖아? 오히려 감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사고로 인한 부정적 상황에서 일상의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긍정적으로 보는 습관을 들이자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그저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평심으로 다음스텝을 밟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어떤 부정적 상황에서라도 그 안에 머물면 그다음 스텝을 밟을 수 없다. 이건 정말 사실이다. 감정은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그다음은 행동이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마음이 어둡고 행동 또한 비 정상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나의 하루를 지키고 한 달을 지키고 일 년을 지키고 싶다면 부정적 감정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네 가지가 내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수련(?) 중이긴 하다. 아직도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루고 싶은 일도 있고 당연히 목표도 있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없어진 것 같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정답은 없다.그저 나는 나에게 다가오는 인생과 예측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어떤 "계기"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내 그릇을 키우고 성장하게 함으로써 나의 삶을 묵묵히 만들어 간다는 그것만이 답이라는 것이다.
우리 삶에 펜듈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는 것, 그저 지나가게 하면 된다는 것. 인생의 일은 두 가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로 나뉜다는 것. 할 수 없는 일은 그저 받아들이고 놓아주자는 것. 삶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것도 다 지나가는 것이고.. 그러므로 중요도를 낮춰야 한다는 것, 중요도를 낮추면 오히려 더 좋은 일이 올 수 있다는 것. 마지막,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의 시각을 찾을 수 있는 습관을 들이자는 것.
엄청 중요하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아니다. 그저 살다 보니 이제는 이런 것들이 이해가 되고 느껴지고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50이 넘은 나이에도 복잡하고 정리가 안 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요즘은 조금.. 아주 조금은심플해지는 것 같아 좋다.
이 편안함은 모든 것이 잘 정리되고 해결됨을 의미하진 않는다. 여전히 힘든 일도있고 고민되는 일도 많지만 예전과 다른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