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by Minnesota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온 몸이 쑤시고 속도 안좋은게 느껴졌다.


어제는 멀쩡하던게 오늘 온건지, 하여간 그렇다.


어제는 남편이 늦게 온다길래 원격 접속을 해서 회사 인수인계자료를 정리해서 보냈다.


그리고 회사 컴퓨터를 포맷했다.


어찌보면 회사를 나오는 일은 이렇게나 간결한 것이리라.


남편과 늦은 밤 나란히 누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 사람이 그러더라.


"어떻게 보면 너는 참 정이 없는 사람이야. 나는 그렇게 못할 것 같은데."


이러더라. 그래서 잠시 멈추고 생각해보니 어찌보면 회사 사람들 눈엔 내가 정 없는 사람이 맞겠구나 싶었다.


나는 회사사람들을 일일이 붙들고 내가 이러이러해서 퇴사를 생각하는 중이에요, 이거 참 말도안되지않아요? 등등의 말을 정말 극히 일부 사람 빼고는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 눈에 나는 그냥 속편하게 회사 다니는 유부녀였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한번 먹고 나니 속전속결로 끝내버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때 느껴지는 무정함이란게 있을것이다. 분명히.


남편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근데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인 것 같아. 성향인거지. 지금 이 회사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 그렇잖아?"


그것도 맞는 말이다. 나는 속으로 3번을 센다. 항상.

그 3번의 기회가 끝나면 두말없이, 긴 설명 따윈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편이다.

모든 관계에서 그랬다.


"나는 지금 이 회사 그만두게 되면 섭섭하고 아쉬운 마음도 분명 들 것 같아. 당신처럼 무 자르듯이는 못할거야. 그래서 한편으론 멋있기도 해."


남편의 마지막 한 마디.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관계든 회사든 무 자르듯이 뒤도 돌아보지않고 끝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무언가 1%라도 미련이 남아있기 마련인 것이다.


나에게 왜 미련이 남지 않았냐 묻는다면,

나는 이 회사를 다니면서 딱히 성취감을 느껴본일이 1번을 제외하곤 없었다.

그리고 회사가 나를 존중한다는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 이 무정한 절차를 밟는것도 내 딴엔 회사를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회사는 나에게 이정도의 존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직장내괴롭힘을 당해서 퇴사를 하고 누군가는 또 그들만의 사유로 인해 퇴사를 한다.

어찌보면 나는 그런 것 없이 '조용한 퇴직' 절차를 밟던 중에 나온 것이리라.


quiet qutting이라는게 이렇게 무서운거라는 걸 알까.

나는 매일 출근할때마다 조금씩 회사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리라.


내 왼쪽, 뒤쪽을 둘러싸고 있는 비전이란 1도 없어보이는 40대 이상의 노처녀들과 정년 퇴직을 앞둔 여자 부장 하나, 그리고 뭐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나는 저들처럼 살 자신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마감하듯이 살아가는 삶에 진이 빨리는게 느껴졌다.

그것은 팀을 바꾸기 이전에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좀 더 생동감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삶에 다가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아주 매서운 날씨였다.

집 앞에 에그셀런트에서 아침을 겟해왔다.


도로가 꽝꽝 얼었고 내 얼굴은 그 사이에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모르겠다. 내가 다시 회사에 들어갈까? 내가 사기업에 가야할까? 공기업에 가야할까?

그것도 아니면 모아둔 돈 다 모아서 요새 국내 탑티어 급으로 장사 잘된다는 메가커피를 하나 차려야 할까?

잘 모르겠다.


20대의 퇴사했을때와 다른 점은, 덜 불안하단 것이다.

이미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사하고 나와서 다른 회사에 떡하니 들어간 성공 경험이 3번이나 있다.

그래서 그런가, 나는 건재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회사가 아니어도 다른 방법은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다시 면접을 보는건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런데 괜찮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싫어하는 공연을 안 해도 되고, 그 일을 하는데 '적극성'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억지로 적극적인 척 하는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줄 사람들은 알까.

적극적이고 싶지가 않은 일을 그만 마주해도 된다는 것 만으로도 내 일상에 희망이 생겼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