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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die Jul 28. 2021

무지개는 꿈

날아가지 않을 상상의 날개

나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보통의 남녀공학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성적과 상관이 없는 학교에 거리순으로 발탁되어 입학했고, 졸업할 즈음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것과 흡사했다. 지원할 수 있는 고등학교의 수는 8개 정도 되었다. 시험을 치르고 선택하는 학교에 입학을 하는 것이었지만, 거리 순도 배제하지 않아서 8개 학교만 지원이 가능했고, 입학은 성적순이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이전부터 피아노를 쳤던 나는 예술고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보수적이고 엄격한 아버지 탓에 조용히 가까운 인문계 고교에 진학을 해야만 했다. 성적순으로 진학을 하는 것이었기에, 그럴 확률이 정말 미미 했다. 가까운 인문계 고등학교는 새로 지은 학교였다. 우리가 입학하는 해에 입학자들의 성적이 바닥을 치게 되면, 공업고등학교로 전환이 될 위기에 놓인 학교였다. 나의 날개가 제 힘을 펼치지 못하게 된 계기가 어쩌면 그로부터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기까지의 시간이 정말 숨 막히게 느리게 지나갔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가 지원한 고등학교의 입학 성적 커트라인이 상당히 높아져 학교가 공업고등학교가 될 위기를 벗어남과 동시에 학교가 중 상위권 학교로 레벨이 높아졌다. 학교를 살린 학년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큼 우리 학년에 대한 선생님들의 기대가 컸고, 덕분에 우리 학년의 성적 관리는 조금 힘들었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학창 시절의 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난한 시간을 보냈고, 성적에 맞추고, 아버지의 뜻에 맞추고 결국 나는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는 제과제빵 전공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처럼, 원하는 학교 중 가장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내내 나는 뚜렷이 동아리 활동을 하지도, 그렇다고 친구들과 특히 잘 어울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내 조용히 선생님들의 요청에 응하는, 공부를 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못하지도 않는. 아주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원아!!!!!!!!!! 야, 잘 지냈어? 야~ 진짜 오랜만이다. 너 진짜 살 많이 쪘다?"

"어어 - 안녕."

"너, 설마 나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지? 야~은암고! 은암고 나왔잖아~ 나 대학교도 너네 학교 옆이었잖아~ 진짜 기억 안 나?"

"아냐! 기억나. 기억나. 어떻게 잊겠어. 아름! 어어-! 그래 잘 지냈어?"

"어~ 나야 뭐, 잘 지냈지. 너 요즘도 케이크 만들어?"

"어? 어어. 뭐, 그렇지. 아무래도 전공이 이거니까. 너는 요즘 뭐해?"

"어, 나 병원 다니다가 그만뒀어! 나 결혼해."
"아, 진짜? 아하하. 축하해.. 겨.. 결혼."


고등학교 내내 그나마 친한 친구로 지냈던 친구였다. 대학교에 진학해서 학교도 바로 옆이었고, 덕분에 더 자주 만났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 최선을 다해서 퍼주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호구라는 별명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서 떠날 사람이면, 내 사람이 아닌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내게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적으로 퍼줬다. 더 빨리 떨어졌으면 하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지금 만난 이 친구는 그 친구들 중에 최악이었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고등학교 내내 아름이는 이과였고, 나는 문과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자주 찾아와서 이것저것 빌리곤 했다. 처음 친해진 것도 아름이가 다짜고짜 체육복을 빌려가면서부터였다. 이과계와 문과계가 교과목이 겹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보통 이과계 아이들은 문과계에 와서 빌리곤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친구가 내 체육복을 빌리게 되었다. 점점 자주 빌리더니, 결국은 돌려받지 못했다. 항상 뭐든 빌려주고 나면 끝이 그랬다. 어쨌든, 그렇게 3년 내내 내게 무언가를 빌렸고, 나는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교에 와서도, 집과 학교를 오가는 거리가 상당했지만, 그 친구의 반 강요로 그 친구의 등하교를 돕게 되었다. 물론, 내차로. 아버지는 나름대로 가까운 대학교로 진학하는 조건으로 면허를 따고, 차를 사줬다. 학교와 집과의 거리는 자차로 30분. 그 친구와 우리 집과의 거리도 30분. 아차 싶게도 트라이앵글이었다. 그 친구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기 위해 굳이 빙 돌아서 등하교를 했어야 할 만큼. 내 전공이 다행히 2년제여서, 나는 2년 만에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 뒤로는 연락하지 않았다. 등하교만 같이 한 것이 아니라, 이것 저것 핑계를 대며 밥도 얻어먹고, 커피도 얻어마셨던 그녀다. 어쨌든 내 기억에 아름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이사를 오게 되면서 그 친구와는 자연히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길에서 마주치기도 싫은 아이였는데. 이렇게 또 우연히 만나니까 기분이 뭣 같았다.


"야, 야! 나 결혼한다니까? 야, 너 마침 잘 만났다! 너 원래 피아노도 치고, 보컬도 했었다며?"

"그게 무슨..?"

"아니, 초등학교, 중학교 때 예고 준비했었다며. 그리고 너, 밴드부였다며? 너, 왜 그런 건 말 안했냐?"

"아니, 뭐 딱히 말할 것도 아니고. 나 그리고 밴드부 활동은 안 했어."

"그건, 모르겠고. 나 축가 좀 불러줘라?"

"응? 뭐라고?"

"나 축가 불러줄 사람이 없네. 축가 좀 불러주라고. 친구끼리 그 정돈해줄 수 있잖아?"

"아니, 다짜고짜 이게 무슨.. 나 그리고 노래 안 한 지 좀 오래됐어, 미안."

"야, 나 벌써 신랑한테 다 말했단 말이야. 네가 축가 해주기로 했다고. 야, 우리 신랑도 너 잘 알던데?"

"신...... 랑? 그게 무슨."

"나, 익현이랑 결혼해. 너, 익현이 좋아했었다며? 야, 미안하다야. 근데, 나 너 말곤 진짜 없어. 부탁 좀 하자.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나는 그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부터 이국적인 외모로 동네에 소문이 파다했던, 남자애가 있었다. 동네라고 하기도 좀 그런 게, 시에서 유명했다. 바로 옆 학교는 물론이고, 시에 속한 학교에서 매일 얼굴 한번 보겠다고 죽치고 있는 애들이 있을 정도로.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유일한 남자 사람 친구였다. 그 친구가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가고, 제대를 하고 나서도 따로 연락해 만날 만큼 그 친구와는 각별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회사가 바빠 매일 야근을 했었는데, 새벽 두 시에 최근을 하더라도, 내가 퇴근해서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잠들지 않고 버티고 있다가 집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런 친구였다.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하면 멀리 서라도 바로 날아와 준 친구. 그리고 타이밍이 신기하게도, 나도 그 친구도 오래 만난 연인과 헤어졌고, 그 시점이 맞았다. 그래서 더 자주 봤던 것 같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잠자리도 하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친구는 그냥 친구를 잃은 거였다고 했다. 그렇게 연락이 끈긴지 한 달. 결혼을 한다니. 그것도, 쟤랑. 거기다, 임신이라니.


"야, 야! 내 말 듣고 있냐? 야! 부탁 좀 하자고. 알았지?"

"너, 익현이 얘기하려고, 축가 부탁한 거니?"

"야, 무슨 말이 그러냐. 그건 그거고, 축가는 축가지. 야, 너 나랑도 익현이랑도 아-주 좋은 친구였잖니. 그러니까, 축가 좀 부탁해. 3월 24일이야. 한 달 남았어! 잊지 마라. 아, 그리고.. (익현이 포기해라)"


그러면 안됐다. 오기가 생겨, 축가를 하기로 했다. 나에게 축가를 부탁하다니. 깽판을 잔뜩 놓아주리란 다짐을 하면서 이를 갈았다. 기왕이면 더 노래를 잘 부르고 싶었다. 거기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신랑 신부가 아닌 나에게 올 수 있도록. 마친, 시즌이 끝나고 회사가 조금 한가로워진 시점인데 잘됐다 싶었다. 한 달. 그래 그까짓 거 내가 한번 뺏어보자. 그런 마음이었다. 하루에 5시간씩 목에서 피맛이 올라올 만큼 노래를 불렀다. 쉬는 날은 15시간씩 노래를 했던 것 같다. 알고 있는 가사지만 하나의 실수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완벽한 복수는 내가 멋있어 보이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깽판을 치는 것보다 더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 달을 노래방 - 회사 - 집. 이렇게만 왔다 갔다 생활을 했다. 가사를 잊을 까 봐 가사지가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쥐고 다녔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웬만학 고등학교 동기는 다 모였던 것 같다. 그 친구들은 과연 어떤 것이 궁금했던 것일까 싶었다. 


식장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 연습을 하러 예식장 건물 위층에 있는 코인 노래방을 들렀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목을 풀고 잔뜩 긴장한 탓에 땀을 흘리며 부스에서 나오는 순간. 왠 반짝이는 정체와 부딪혔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그 정체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자마자 고개를 들 시간도 없이, 식장으로 향했다. 여기저기 수군대는 게 들렸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나는 존재감이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도 내가 존재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내게 기분 좋게 인사하는 동기들을 뒤로하고, 신랑 신부와 짧은 눈인사를 한 후 나는 먼저 식장으로 들어섰다. 


"MR 가져오셨나요, 아니면 저희가 준비를 해야 할까요?"

"아, MR 어제 파일로 보내드렸는데요. 혹시 못 받으셨을까요?"

"아! 그거요? 오르막길? 잠깐만요, 아아! 여기 있다. 죄송해요.. 오늘 식이 많아서 준비된 MR이 좀 많아가지고. 우선 마이크 사운드 체크 먼저 하고요, 식이 시작되기 전에는 여기 신랑 측 부모님 뒤쪽에 앉아 계시면 되고요. 식이 시작되면 제가 사인을 드릴게요. 혹시 악보 보면서 하셔야 할까요?"

"아뇨, 악보는 없어도 돼요. 사운드 체크만 하면 될까요?"

"네네, 다른 건 조율 다 되어있으니까, 한 번만 해볼게요."

"~&#%^#@@%&!~ 음음, 이 정도면 될 것 같죠?"

"어..... 어오.... 어 와, 네네. 어 될 것 같아요. 우선 저쪽에 앉아 계시면 되고요. 물 필요하시면 생수 한 병 가져다 드릴까요?"

"아, 네네. 감사합니다. 하하. 식장이 좀 덥네요, 부탁드릴게요."

"네, 금방 가져다 드릴게요! 앉아 계세요! 아, 신부님이랑은 인사 따로 안 하셔도 되나요? 하셔야 하면, 지금 다녀오셔야 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잠깐의 사운드 체크를 한다고 부른 한 소절에 시끄럽던 예식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예식장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리고 끝마치고 자리에 앉자마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수군대는 이야기들이 칭찬이기도 하였다가, 간혹 욕이기도 했다. 그리고 살짝 또 노래방에서 만났던 반짝이는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짧은 순간이라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밝았다. 평소 같았으면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그 사람을 따라 눈이 쫓아갔을 테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완벽해야 했다.


식이 시작되기 전, 나는 익현이의 가족이 앉은 바로 뒤편에 자리했다. 직원이 가져다준 물을 마시고 있는 데, 익현이의 형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제대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축가를 잘 부탁한다는 인사 정도였던 것 같다. 잔뜩 긴장한 채로 순서를 기다렸다. 신랑 신부의 입장이 끝나고, 지루한 주례사가 끝이 났다. 주례는 고등학교 때 체육선생님이 맡으셨는데, 유머러스하던 선생님은 어디 가고, 웬 보수적이고 딱딱한 사람이 되어 내내 하품이 나오게 했다. 선생님의 한마디에 식장 내가 술렁거릴 정도로 지루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을 했다. 지루하던 것들이 끝나고 났을 때의 집중력은 무시 못하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이제 축가 준비할게요.."


식장 직원의 지시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곧이어 모든 조명이 꺼지고, 신랑 신부를 비추는 조명과 나를 비추는 조명만이 켜졌다. 축가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에 대해 굉장히 오랫동안 고민을 해왔다. 폭탄 같은 발언을 하고 충격을 먼저 줘버릴까, 아니면 어떤 말도 하지 않아야 하는가. 상당히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답을 내리지 못했고, 나는 간단히 목례만 하고 노래를 시작했다. 축가로 선택한 노래는 가수 정인이 부른, 윤종신- 오르막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지루한 주례가 끝나서였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모두가 나의 노래에 집중했다. 내게 무례하게 굴던 신부는 결국 눈물을 떨궜다. 우습게도 신랑은 그런 신부를 보지 않고,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정신에 불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축가는 끝이 났다. 나중에야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 그 결혼식에 온 모든 사람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으며, 그날의 신부보다 나를 더 기억한다고 했다. 성공적이었다. 한 달을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축가가 끝나고, 식이 마무리될 때까지 나는 익현이의 형 뒷자리에 앉아있었고, 익현이의 형은 식이 끝나는 내내 내게 말을 붙였다. 축가에 대한 이야기며, 둘의 결혼 이야기며 궁금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자신은 현재 만나는 사람이 없다는 TMI까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나는 마무리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끝까지 자리했다. 내가 계획 한대로, 신부가 받을 스포트라이트는 다 내게로 쏠렸다. 직업의 특성상 케이크와 같은 디저트 류를 섭취하는 일이 잦아 잔뜩 몸이 불어난 상태였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그것마저 마음에 든다며, 연락처를 물어보는 동기들이 많았다. 그렇게 신부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잔뜩 받으며, 꿋꿋이 뒤풀이까지 자리했다. 눈에 띄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성격 탓에, 모임은 당연하고, 어떤 자리도 나가지 않았었던 나였지만, 그날 축가 하나로 나는 인싸가 되었다. 어쩌면 복수 아닌 복수를 한 샘이었다.


"야, 원이 알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노래 잘한다~ 야, 동창회도 안 나오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래, 원아~ 너 요즘 뭐하고 지내?"

"야, 근데 너는 아름이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축가가 해주고 싶었어?"

"야, 아름이가 왜? 둘이 뭐였는데?"

"야, 강아름 걔, 완전 여우였잖아. 얘가 내가 알기론 대학 때 등하교까지 시켜줬을걸."

"맞아 맞아, 강아름이 앞에선 겁나 친한 척하고서, 필요한 만큼 뽑아먹고, 뒤에선 겁나 깠잖아."

"근데 축가를 해준다고? 야, 역시 진짜 너 호구구나?"

"야, 호구 아니고, 착한 거지. 야야 근데 노래 진짜 잘하더라, 연습 엄청 했겠는데?"

"야, 근데 익현이가 얘 좋아하지 않았냐?"

"맞아, 너 익현이랑 서로 좋아하지 않았어?"

"저기.."

"어어. 왜애"

"말해, 말해. 야야 너네 조용해봐, 원이 얘기 좀 듣자."

"어, 나는 그냥 축하해 달라고 해서, 축하해주러 온 것뿐야. 과거는 뭐, 지나간 거고. 아름이랑 익현이 잘 살았으면 좋겠어. 너네도 그러니까, 이제 그 얘긴 그만하고. 축하하러 왔으니 축하만 하자."

"그래그래, 야, 그건 원이 말이 맞다."

"그래, 지금 그 얘기해서 뭐하냐. 이미 끝난 일인데."

"쟤는, 여우야, 호구야.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네. 야, 보살이냐 네가?"

"됐어, 됐어. 그만해. 한잔해, 한잔해!"

"그래, 짠!"


시선을 뺐고 싶었던 것은 맞지만, 굳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내가 하게 된다면, 어차피 같은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하나씩 취해가고, 나는 더 취하기 전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길에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원아!! 잠깐, 잠깐만."

"왜! 이거 놔. 이거 놓고 얘기해."

"잠깐만 나랑 얘기 좀 하자. 잠깐이면 돼. 정말."


그 사람은 익현이었다. 익현이는 주위를 살피더니 내 손을 이끌고,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나를 데리러 오던 그 차로 나를 데려갔다. 그리고 내게 해서는 안될 인사를 했다. 키스였다.


"놔. 그만해."


겨우 그를 뿌리치고 제자리에 앉아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가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안다. 내가 얼마나 저 눈물에 속아왔는지. 내가 5년을 만난 사람과 헤어지고 딱 석 달째 되던 때, 익현이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3년을 만나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그리고 나는 그 울음에 놀라 곧장, 익현이가 있는 대전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울음에 속았다. 관계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나는 그와의 미래를 함께 할 것이란 기대에 차있었지만, 그는 잠자리가 고플 때마다, 눈물을 보였고, 다음날 아침이면 실수였다 사과했다. 오늘 그의 모습도 딱 그때, 그 꼴이었다.


"나.. 진심이었어."

"그때는 아니라고 했어."

"그땐, 무서웠어. 그래도, 우리 친구였으니까."

"친구.. 이긴 했었을까. 우리가."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잃을까 두려웠어. 너를 잃는다는 걸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까. 그리고, 아직 모를 수도 있고, 이제는 알지도 모르겠지만.. 좋아해, 형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진짠지 거짓인지 판별할 수도 없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익현이가 흐느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너도 어이가 없겠지. 막장드라마도 아니고."

"그래, 잘 아네. 네가 봐도 막장이지, 이거? 지금, 말 안 되는 거, 이해 안 되는 거 알지? 나만 그런 거 아니지?"

"형이, 너 좋아했어. 중학교 때부터. 그리고 나는 너랑 멀어지고 싶지 않았고."

"근데? 어차피 다 끝났잖아. 게임오버. 웃기고 있네. 나는 말이야, 덕분에. 아주 덕분에 인싸가 됐어, 오늘. 나 진짜 열심히 노래했어. 완벽한 마침표를 찍으려고. 우리 이야기에."

"너는, 이게 마침표야?"

"어. 마침표야, 더 이상 쉼표는 없어 우리 사이에. 너네 형한테도 전해줄래? 어영부영하는 사이 버스는 떠났다고. 그러니까 꿈 깨시라고. 막장 드라마에 조연으로 충분하다고. 됐지? 그리고, 너. 아름이한테나 잘해. 결혼 축하하고."

"야. 야! 영 원! 야. 내 얘기 좀 들어보라고!!!!!"

"뭔데. 개소리 지껄일 거면, 아가리 해라. 나 이제 더 이상 호구 짓 하고 싶지 않고, 그러기엔 어리지 않다."

"실수였어. 진짜야, 나 진짜 실수였어. 한 번에 애기가 생길 줄 몰랐어. 나 아름이랑 결혼한 거, 아름이 안은 거 진심 아냐, 알잖아. 너도 알잖아. 알았잖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지금 그런 얘기 해봐야 어쩔 건데."

"그냥, 우리 그때처럼 가끔 만나 술도 한잔 하고 그렇게 지내면 안 될까?"

"어어.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잠자리 고프면 찾아오겠다. 그거네? 맞지?"

"아니, 뭔 말을 그렇게 해! 그게 아니잖아! 나는 너라고. 제발. 진심이야. 한순간의 실수로 생긴 아이야."

"어어. 아름이도 이거 알고?"

"알겠지. 그러니까 너를 축가로 세웠겠지."

"근데?"

"어?"

"근데."

"뭐가, 근데야?"

"어차피, 우리 이야기엔 어떤 결말이었던, 결말이 이미 났어. 한 달 전에. 그리고, 이렇게 너 개소리하는 거 듣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서. 넌 한가한가 보네. 난 내일 출근이라서. 이만 갈게. 잘살고. 그래, 아주아주 잘 살고, 연락하지 마라."

"야!!! 야!!!!!!!! 원아!!! 원아!!!"


가뜩이나 피곤해 죽겠는 몸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상대하느라 지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도저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박차고 나왔다. 벗어나고 싶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누가 내게 제대로 정리해서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아무도 이 일에 대해, 여기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 더 이상 아무 이야기도 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도 정신이 없었다. 하루를 정신력으로 늘 버티던 나였는데, 관계에 여러 번 마침표를 찍느라 내내 기운을 뺐더니, 제정신일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리자, 먹은 술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숙취해소제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 앞, 편의점으로 갔다. 


"어서 오세요. 지큐입니다."

"안녕하세요"


점원의 인사에 꾸벅 인사를 하고, 숙취해소제와, 소화제. 그리고 잠들지 못할 밤을 대비한 맥주 두 캔과, 오징어, 그리고 쭈쭈바를 대충 골라 계산을 하고 나왔다. 역시 술에 취했을 땐, 아이스크림을 지나치지 못한다. 긴장이 풀리고 취기가 올라오니, 아이스크림이 더 맛있어졌다. 한참을 아이스크림에 집중하고 있다가, 예식장에서 본 그 빛을 봤다. 


"아니, 무슨 이 야밤에 이렇게 눈이 부시... 어? 사람이네에~? 사람이야 아~"

"저기, 저기요! 어어어! 넘어지겠어요! 괜찮아요? 아유, 취했네, 여기 앉아요."

"아유- 고마쯥니다 아~ 고마 오요!"

"어? 아까 그! 그분이다!"

"나 아를. 나 아를 안다! 너는 누구냐! 훠이훠이! 너는 누군데 나를 아느냐! 나를 알리가 없어. 나를 알리가!"

"저, 그 아까. 어어어 어! 아유, 어떡하지. 이대로 두면 감기 걸릴 텐데. 저기요!! 저기요!! 좀 일어나 봐요!! 집이 어디예요?"

"야!!!!!!!!!!!!!!!!!!!!!!!!!!!! 너 누구야!!!!!!!!!!!!!!!!!!! 손때!!!!!!!!!!!!!!!!!!!!!!!!!!!!!!!!"


-와다다 다다다 다다. 찰싹. 퍽퍽.


"이년아!!!! 일어나!!!!!!!!!!!!!!!!!!!!!!!!!! 야!!! 너 뭐야! 너 뭔데 얘 머리를 흔들어 재껴!!! 너 뭐야!!!!!"

"아유, 아니, 저 그게. 이분이 취하셔..........."

"아니, 어머! 얘가 취했, 어머 잘생기셨네. 어머머. 얘 알아요? 야야, 일어나 봐 야!!!!! 할망구!!!!!!"

"아쒸! 흔들지 마 웩. 웩. 아, 속 안 좋아, 어? 마시다! 마시다!!!! 할마시다!!"

"야, 어 나야. 야, 정신 차려, 미친!!! 할망구!!!!!!!!!!!!!!!!!!!!!!"

"저,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친구분 오셨으니까."

"아니!! 저기요, 아니 그냥 가시게요? 근데, 얘 알아요?"

"아뇨, 몰라요. 노래를 아주 잘하신다는 것 말고는."

"잉? 노래?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그분 깨시면, 전해주세요! 오늘 멋있었다고!"

"그게, 뭔 소리야. 야야! 마시 정신 차려 집에 가자!!! 집에!!!"


- 야 이년아, 정신 차리면 전화해. 콩나물국 끓여놨어. 라면 처먹지 말고, 밥 먹어. 꼭 전화해라. 꼭.


결국, 기억이 없다. 마지막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너무 뻔했다. 저렇게 우렁각시 흔적이 있는 거 봐서는. 할마시가 끓여준 콩나물 국에 밥을 말아 한 사발 쭉 들이켰다. 남들은 술 먹은 다음날 아침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데, 나는 술 먹은 다음날은 평소의 세배는 잘 먹는다. 결국 끓여놓은 콩나물 국을 냄비채 다 먹어버렸다. 어제 익현이에게는 오늘 출근한다고 했지만, 안다. 그 자식 회사로 쫓아와 기다릴 것이라는 거. 그래서 미리 연차를 써뒀다. 일주일 정도. 할마시가 내 오랜 친구이자, 내 직장 상사였고, 사연을 듣자마자 본인이 더 열을 내며, 내게 긴 휴가를 내줬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고 오라고. 어차피 그런 정신머리로 출근해봐야 다치기 밖에 더하냐는 말과 함께. 그리고, 안다. 분명 연락이 되지 않는 내가 걱정이 되어서 우리 집 근처를 서성였을 거라는 거. 


참, 슬픈 이야기지만, 나는 온전하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내게 과부하가 왔고, 오래 만난 남자 친구 덕분에 그나마 버티고 있던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할마시가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멘탈이 부서지는 일이 있으면 꼭 크게 다쳤다. 어디 하나가 부러져야 잡생각이 멈췄다. 그래서 분명, 잔뜩 걱정이 된 채로 서성였겠지. 내가 혹시 변사체로 발견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이제부터~ 웃음기 사라질 거야~'


"어 - 왜."

"어? 왜? 야. 너는 인마 생명의 은인한테 어- 왜? 이게 빠져가지고!!!!!!! 내가 일어나면, 전화하라고 했어 안 했어!!!!!!"

"어, 밥을 먹으라고 했지."

"야!!!!!!!!!!! 밥을 먹기 전에 전화를 먼저 했어야지!!!!!!!"

"아, 왜애. 아침부터 기운이 좋냐 넌, 애가 왜캐. 야야. 귀 아파. 머리 울려. 쉿, 조용."

"아니, 야. 너 어제 그 남자 누구야."

"그 남자가 누군데?"

"아니, 어제 너 편의점 앞에서 같이 있던 남자!!!!! 이년아!!!"

"내가 누구랑 같이 있었.... 아아. 몰라? 처음 본 사람."

"에? 누군지 몰라? 근데 왜 그 사람은 널 알지?"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아침부터."

"아니, 어제 마치 너를 안다는 듯한 말을 했단 말이지."

"읭? 뭐라 쿠든?"

"아니, 뭐. 너 멋있었대."

"엥? 뭐래. 내가 멋있을 일이 뭐 있다고."

"너 깨면 전해달라던데? 너 멋있었다고. 아니 그니까 누구냐고."

"엥? 내가 멋있어?"

"어, 노래 잘해서 멋있다고 했나? 암튼, 그랬어. 그니까 누.구.냐.고. 누구!"

"나도 누군지 몰ㄹ.. 아! 예식장에서 본건가 설마....... 흠, 누구지... 아, 몰랑. 알바 아니고. 야, 우렁각시. 콩나물국 잘 먹었다."

"야이 씨. 암튼, 나 지금 생산실 들어가야 되니까. 이따 다시 얘기해. 기억해내라!!!!!"

"아, 예예. 과장님. 그러므닙죠, 그러므닙죠. 굽신굽신. 고생."

"아놔, 너이새ㄲ......!@#$$#@@$#"


끊어버렸다.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지금은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어제 본 그 남자가 아닌 왠 다른 잘생긴 남자가 나를 찾으러 왔다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새로 옮긴 자취방의 주소를 몰랐던 익현이는, 예상대로 회사에 가서 나를 찾았다. 출근시간부터, 퇴근시간까지 3일을 죽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 본 순간부터 느낌이 쎄했다며, 할매는 나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3일째 되던 날 화를 참지 못한 은진이는 경찰을 불렀고, 익현이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여하튼, 전날 거하게 먹은 술 때문인지, 군것질이 땡겼다. 나는 술냄새가 나는 꼴로 밖을 나갈 수 없어 샤워를 하고 나온 뒤 안경을 쓰고, 머리를 대충 올려 묶고서 편의점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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