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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die Oct 06. 2023

일을 그만뒀다.

일을 그만뒀다. 아니 짤렸다.


더 이상 월급을 줄 돈이 없다고 했다. 가게를 운영할 여력도. 몇 달 치 밀린 4대 보험도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았다. 처음 입사할 때에는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은 점점 내 눈만 마주쳐도 피했다. 그리고 도저히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해 실업급여를 받기로 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그만두기로 하고서 이틀 뒤부터 천만 원이나 들여 간판을 한다고 들떠서 그만둘 직원들 앞에서 신나 하던 그들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다시 잘되면 부른다. 그럼 다시 올 것 아니냐. 뻔뻔한 그 얼굴에 뜨거운 커피를 부었어야 했다.


삶의 모든 부정이 한 번에 쏟아졌다. 오후의 여유로운 햇살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기분 좋은 온기마저도 귀찮을 만큼. 유일한 낙이었던 어떤 것들이 여전히 무해한 온기를 준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저것들이 내게 주는 행복이 결국은 끝에 유해함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찮은 부정으로 밀어냈다.


항상 한 가지의 부정이 나를 곁에 두려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결국 내가 가진 이 부정이 한번 나를 끌어당긴다 느낄 때부터는 수많은 부정이 나를 둘러싼다고. 그래서 부정의 부름에 응답하지 말아야 한다고. 내가 점점 더 어두운 그늘에 나를 가두고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지려 할 때마다 나는 짐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의미도 계획도 생각도 없는 걸음을 디뎌 평소 내가 좋아했던 음식과 좋아했던 음료, 편안했던 장소를 무작정 찾아간다.


며칠간 나는 나를 방치했다. 끙끙 앓았다. 스트레스가 극한으로 치달을 때면 나타나는 일종의 의식 같은 거다. 인신공양이랑 비슷한 거겠지. 부정이 나를 삼키게 둔다. 갉아먹히는 동안 조금 더 심하게 앓는다. 그렇게 며칠을 앓고 나면 조금 정신을 차리는데 여전히 무기력에 잡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때가 온다. 평소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나. 작은 것 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음에 들 때까지 바삐 움직이던 나와는 전혀 다른 나. 작은 것들에도 행복을 느끼던 조금은 멍청하기까지 한 나는 그 기간 동안은 어떤 것에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예를 들자면 햇빛이 들어오는 오후, 향긋한 커피, 사랑하는 사람의 연락, 따뜻한 물로 하는 샤워, 좋아하는 음악 코끝에 서린 차갑고 깨끗한 공기. 그런 것 말이다. 어쩌면 작은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누군가에겐 어마어마한 행복이었을 수도.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것들마저 느끼지 못한다는 거다.


긴 여휴동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 중에 아마도 가장 길었을 것이다. 투덜투덜 왜인지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칭얼대기도 했지만, 최근의 그 어떤 날들 보다도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다. 현생의 일은 모두 잊고 그 사람의 품에서. 그 사람의 보호아래서. 관심 안에서. 세상의 어떤 일도 그 사람과 함께라면 괜찮지 않냐고 느낄 정도로. 낯선 환경과 낯선 어떤 것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음에도 그렇지 않았고, 그렇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떤 일에도 그가 있으니까 곧 괜찮아졌다. 그리고 연휴는 끝이 났다.


그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나는 나를 가뒀다. 부정이 나를 삼키고 끙끙 앓는 동안 나는 해를 보러 나가지 않았다. 부정에 더 삼켜지길 자처했다. 이틀이었던가. 사흘이었던가.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쓰레기가 평소와 다른 속도로 쌓여가고, 집안일은 산더미처럼 불어났다. 설거지 하나만 생겨도 스트레스받아 바로 치워야만 했던 나는 어디도 없다. 게을러졌다. 그렇게 점점 더 끙끙 앓았다. 그 사이에 화재경보기와 인터넷선로 교체공사로 아저씨들이 다녀갔지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나는 각성했다.

이대로 더 오래 삼켜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따뜻한 물로 말끔히 샤워를 하고, 대충 아파 보이지 않게 얼굴에 화장을 하고, 지난번 무작정 읽다가 덮어둔 책과 보조배터리, 무선이어폰, 지갑, 노트와 펜을 가방에 욱여넣고, 터질 만큼 가득 찬 종량제 20L, 10L 두 봉지를 들고서 비틀비틀 밖을 나섰다. 뭘 가장 먼저 할까 고민을 하면서.


내가 사는 아파트는 언덕 위에 있다. 아니지, 더 나쁘게 말하면 아무리 봐도 산 위에 있다.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면서 허기가 느껴짐을 알았다. 아, 내가 오늘 밥을 한 끼도 먹지 않았구나.라고. 곰곰이 생각을 하다 평소 좋아하지만 오픈 시간이 짧아 먹지 못했던 국숫집을 가기로 했다. 국숫집에 가서 핸드폰으로 짱구를 틀어 놓고선 따뜻하게 국수를 한 그릇 먹고, 별다방으로 갔다. 지리상 조금 더 가까운 위치의 별다방으로 갔지만, 사람도 너무 많고 공기가 너무 답답해 그대로 나와 다니던 직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굳이 별다방이었다.


아무래도 책을 읽고 자리에 오래 머무르기엔 개인 카페는 조금 불편했다. 물론, 음료를 밥보다 좋아하는 탓에 두 시간에 한잔꼴로 음료를 주문해 마신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연유로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별다방으로 와 책을 펼쳐 들었다가, 이런저런 생각에 펜을 들었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것인지 잊어버리고 무턱대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어둡고 부정적이고 게으르고 끙끙 앓던 그 시간을 가만히 넘기고 그것들로부터 탈출한 기념이랄까. 삼켜졌던 시간을 고스란히 뱉어내고 싶었다. 무기력을 탈피하기 위해서. 그것만으로도 지금의 이 글쓰기가 내겐 무척이나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늘 주문한 신상 음료는 실패.


이제 다시 나를 긍정으로 끌어내야지. 차가워진 공기, 산뜻한 풀냄새. 다정한 그 사람의 목소리. 파란 하늘. 가을이라는 걸 알려주는 꽃. 조금은 짧아진 햇살이 머무는 시간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충분하지 않나. 다른 건 몰라도. 계절을 알려주는 무언가가 내 앞에서 춤추는 것과 그걸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게. 그래 그거면 됐다. 실패한 음료를 마저 마시고, 덮은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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