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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이름 Jan 28. 2023

산후우울, 길 잃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한 일

기록하기, 비슷한 시기 출산한 친구들에게 도움 요청하기

공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더욱 절실히 알게 됐다. 나는 마흔둘,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운이 좋게도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하게 된 두 친구가 있었다. 물론 나보다는 어리고 심지가 아주 단단한 친구들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다른 회사에서 만난 사이로, 퇴사를 한 이후 인스타그램을 통해 임신 소식을 알게 됐는데 공교롭게도 출산 시기가 비슷했다. 늦여름과 초가을 우리는 모두 출산을 했고 각자의 자리에서 신생아를 돌보며 힘든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버거운 날이면 나는 '온라인 출산동기'들에게 카톡을 하거나 DM을 보내 안부를 묻기도 하고 조언을 구했다.


밤이 오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아기를 데리고 집에 온 지 한 달이 안 됐을 때, 밤에도 2시간마다 깨는 아이를 안아 재우다가 너무 지친 날이었다. 밤이 오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혼자서 아이를 지키고, 깊이 잠들기만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견딜만했던 칭얼거림이 밤에는 나도 잠을 못 자니 한층 더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다. 멘털도, 체력도 바닥을 친 날. 왜 이렇게 잠을 안 자는 건지, 왜 밖에만 나가면 금방 지쳐 재빨리 집에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인지 한참 동안 하소연을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안아서 재우지는 않겠죠? 저는 단기 알바한다고 생각하고 버티고 있어요“


고맙게도 한 친구는 자기 역시 그렇다며 “그래도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안아서 재우지는 않겠죠? 저는 단기 아르바이트한다고 생각하고 버티고 있어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 잘못이 아니라 체력이 떨어져서 감정까지 힘들어진 거라며 몸을 챙기는 게 중요하다고, 그래야 마음도 단단해진다고 말해주었다. 재치 있는 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눕히면 깨어버리는 아기를 다시 안을 때마다 ‘그래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안아서 재우지 않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공감이 담긴 말에는 힘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또 한 친구는 바람을 쏘이러 나와서 본 하늘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고, 이상하게 한 없이 작아지는 나에게 회사 다닐 때 내 모습을 떠올려 주기도 했다. ‘고된 회사 생활하면서도 첫째를 잘 키워냈던 것처럼 지금도 잘 이겨낼 것’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그 말 덕분에 나도 잊고 있었던 내 모습을 떠올렸고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었다.


아무 의욕 없이 아기를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는 일에만 집중하다가 너무 허무하게 가버린 시간때문에 불쑥 우울해지는 날도 있었다. 힘든 채로 적응이 되어 버려 하루하루빨리 보내는 데만 온 힘을 다했던 시기. 그러다가 뭐라도 해봐야겠다 싶어서, 임신 이후부터 출산, 조리원까지 틈틈이 찍어 놓은 영상을 붙여보기로 했다. 임신 전부터 유튜브에 브이로그를 올리곤 했었는데 그 영상들을 누가 봐주지는 않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게 중요한 기록이 되었기에 시간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영상을 붙여 편집을 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사이 아기도 제법 자라 갓 태어난 티를 벗어나고 있었다. 조리원에서 먹었던 미역국과 거기서 보냈던 힘들었지만 달콤했던 시간도 생각이 났다. 몸이 고달파 아기 사진 찍는 것도 힘겨웠던 시간이 아쉬울 정도였다. 어설프지만 영상 한 편을 완성하고 나니 그날부터는 아기의 자라는 모습을 찍고 영상으로 조금씩 기록할 기운도 났다. (하지만 다음 편은 아직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임신기간 쓰다가 멈춰둔 ‘마흔둘 둘째 완주기‘라는 제목의 세줄일기도 다시 썼다. 그날그날 사진과 함께 간단히 기분을 적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것도 제법 모이니 책 한 권 분량이 되었다. 기록을 해놓고 보니 내가 보내는 하루가 조금은 의미가 있게 느껴졌다.


출산을 하고 나면 하고 싶은 일을 막달에 미리 적어 두었는데, 그것도 찾아서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당장은 실행 못하는 일도 꽤 있었지만 그때 기록해 두었던 일을 꺼내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감정을 조절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막달에 너무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둔 것인데 이 중에 세 개 정도 밖에 해내지 못했다.

아기를 돌보는 일은 함께 기다리는 일인 것 같다. 태어나 세상에 적응하기를, 목에 힘이 생기기를, 뒤집기를, 배밀이하는 날을 차분히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보내는 일. 드라마틱한 변화가 없는 날이 많아 하루는 지겹지만 한 달은 훌쩍 가버린다.


나는 소소하지만 확실하고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며 이 지겨움을 이겨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라디오에서 7시 10분쯤에 나오는 뉴스코너를 기다리고, 11시쯤에는 <브런치카페> 이석훈 목소리를 기다린다. 점심 후에는 첫째가 돌아와 재잘대며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하는 시간을 기다린다. 그러다 <6시 내 고향>이 시작하면 ‘아~ 지금부터 4시간 안에 힘든 일은 끝나겠구나.‘ 생각한다.


특히 다음주 예고는 놓치지 않고 본다. 유퀴즈 예고,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 예고, 나 혼자 산다 예고. 그걸 보면서  다음 한 주를 또 버텨낼 기운을 얻는다. 기약이 없는 어떤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예고가 있는 확실한 기다림은 성실한 만족감을 주니까.


아기는 고맙게도 예쁘게 잘 자라주고 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뒤집을 준비를 하고 목에 힘이 생겨 안고 여기저기 다녀주기를 바라는 눈빛을 던진다. 시간이 빨리 가면 좋을까 천천히 가면 좋을까.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을 들여다 보다 보면 또 어느새 나는 또 이만큼 멀리 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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