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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피로한 일이다.

by 정희주

설마, 우리 아이가?


"엄마, 문재인은 공산당이야?"

몇 달 전 주말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던 중에 중학교 3학년 아들이 뜬금포 같은 질문을 했다. 10대 청소년들이 우경화되는 경향이 있다더니! 세상에! 말로만 듣던 그 일이 우리 집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함께 밥을 먹던 가족들이 일제히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일시 정지가 되었다. 정신을 차려 아들에게 그 질문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물었다. 아들은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알게 된 채널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은 공산당이라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당황한 나머지 “그거 가짜뉴스야”라고 짧게 말하자 아이는 마치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자신만이 진실을 아는 사람처럼 억울해했다. 어떤 영상을 본 것이냐고 물었다. 아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영상을 찾아 틀었다. 영상을 튼 지 몇 초 만에 같이 밥을 먹던 남편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는 남편에게 눈치를 주며 아무런 내색을 하지 못하도록 신호를 보냈다. 가짜뉴스라는 말로 대화를 끝내면 아들은 “너는 거짓말을 믿는 바보야”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대화가 단절되느냐 이어지느냐의 순간이었다. 나 역시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꾹 참고 20분을 견뎠다. 20분의 긴 시간 동안 우리 가족이 본 것은 정성스럽게 잘 편집된 가짜뉴스였다.


아들은 이 영상 속의 사진은 실제 사진을 찍은 것인데 어떻게 거짓을 수가 있으며,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사람이 ‘좋아요’를 누를 수 있냐고 하면서 혼란스러워했다. 영상 속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공산당이고, MBC는 친중국 성향의 뉴스 보도를 하고 있으며 사회 곳곳에 공산당이 암약하고 있기에 12.3 계엄선포가 불가피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실제 사진 자료를 활용해서 제작했기에 처음 이와 같은 정보를 접한다면 사실에 기반한 정보라고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나는 하나씩 짚어가며 그 뉴스의 클립이 왜 사실이 아닌가를 증명해야 했다.


아들에게 설명하면서도 마음속에는 계속 브레이크가 걸렸다. ‘왜 이렇게 당연할 걸 설명해야 하지?’ 피로가 밀려왔다. 하지만 사랑은 ‘피로(疲勞)’라는 말 그대로 지치고 애쓰는 노동이 아니겠는가. 지금 아이의 말을 무시하면 부모에 대한 반감으로 가짜뉴스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어 갈 수도 있다.


우선 별 논쟁이 필요 없는 사건부터 접근했다. 그냥 전 국민 듣기 평가 문제를 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2022년 미국 순방 때 윤석열 대통령의 문제 발언 “바이든 vs 날리면” 사건을 들려주었다. 아들은 눈이 똥그래졌다. “이거 진짜야? 와…. 충격이다.” 뉴스를 보도했던 MBC가 어떤 탄압을 받았는지, 어떻게 친중 언론 프레임을 쓰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는 자신이 보고 들었던 정보들을 엮어 퍼즐을 맞추기 시작했다. MBC를 종북이라고 욕했던 사람들의 일부가 윤 전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 직후, 서부지방법원에서 폭동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때야 아이의 혼란스러운 눈빛이 사그라들었다. 자신이 응원했던 신남성연대의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묻지도 않는 고백까지 했다.




아들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면서 “그래도 여가부는 폐지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이 역시 전형적인 극우 유튜버의 주장이었다. 나는 아이가 어린 시절부터 진보적인 담론 교육을 받아왔다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 고학년 때까지 매일 잠자리에 누워 대화를 나눴다. 불을 끄고 누워서 유치원 때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초등학교 들어가고선 내가 읽었던 책에 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전쟁, 차별, 성 등... 아이들은 특히 전쟁과 같은 세계의 큰 갈등에 관해 관심을 보였다. 책 내용의 심화 버전을 더 들려달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힘의 불균형과 인권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야기의 화자인 내가 약자 편에 있으므로 당연히 대화는 약자와 소수자 입장이었을 것이고 아이들은 내 이야기를 잘 받아들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랐던 아이가 ‘여가부 폐지’를 운운했기에 충격이 컸다. 솔직히 ‘문재인 공산당’ 발언보다 더 충격이었다. 나는 아들에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아들은 “게임 셧다운제나 마인크래프트 연령 제한 같은 거 보면 너무 어이가 없잖아. 여가부는 쓸데없는 일만 하는 것 같아.” 그제야 아이의 분노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았다. 게임을 한심한 것으로 보면서 규제에만 급급했던 정책에 답답함과 억울함을 느낀 것이다. 게임의 유용성에 관해 관심을 두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억압시키는 정책에 반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취향과 관심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고 규제만을 하려는 사회 분위기에 분노를 느낀 것이다. 마치 자신을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을 수도 있다. 아이의 질문과 주장 속에는 ‘분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한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제한과 비난만 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아들의 분노는 군대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은 ‘역차별’이라며 군 가산점 제도의 부활이나 여성의 대체복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아이의 질문은 마치 ‘엄마는 내 편이야, 아니면 페미니스트들 편이야?’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게임으로 치면 가장 어려운 마지막 퀘스트가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내가 생각하는 거시적인 방향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갈등의 유지가 아니라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관점에서 군대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은 개인의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어떤 국가 정책은 큰 철학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통일 문제라고 덧붙였다. 다만 거시적 담론 속에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거나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고 조용히 이 대화를 듣고만 있는 쌍둥이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남자들의 군 복무에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에 아들은 더는 ‘여자도 군대에 가야 한다’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말에 동의하며, 우리나라에서 군인들이 조롱거리가 되는 현실이 매우 잘못된 것 같다고 했다. 아이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주장을 이어가지 않았다. 군대 문제를 밥상머리 대화에서 찬반으로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 무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도 충분한 논의와 시간이 필요한 사안이기도 하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쉽게 결론 낼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


진심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미 오해와 불신으로 가득 찬 ‘너’와 ‘나’ 사이의 대화가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격랑 하는 감정의 파도를 뚫고, 싸가지 없는 거친 말이 가시처럼 박힌 동굴 속을 지나, 상대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둡고 깊은 숲 너머에야 진심이 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반영된다. 무언가가 좋다면 그것은 내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극우성향의 콘텐츠에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 속에 자신의 결핍을 채워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들은 극우 유튜버가 만든 콘텐츠를 보며 자신이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을 동일시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복잡한 세상에서 좀 더 명쾌한 해답을 신속하게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이의 혼란을 모두 명료하게 해결해 주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단번에 없애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아이가 어떤 고민 속에 있는지는 알게 되었다. 아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감정을 인정받고, 사실에 가까운 콘텐츠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씩 편향된 정보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시야를 확장하며 지금도 정보를 판단하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새로운 길이 열린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아이는 다시 길을 내며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이다.


밥상머리 대화를 나눈 후 몇 개월이 지난 지금, 아이는 더 이상 정치적 이야기로 공분하지 않는다. 이제는 나와 게임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아들이 좋아하는 게임 속에도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 그리고 고민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렇게 게임을 매개로 아이의 마음과 만나고 있다.


아이와 이 일을 겪으며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경청은 대화의 시작이자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가 내 말을 듣고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다시 한번 세상을 믿어보고 싶은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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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웹진 민들레> vol. 07호에 동시에 실린 글입니다.

https://mindleweb.stibee.com/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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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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