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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by 정희주

지난겨울 집안에 여러 가지 일이 생겼다. 갑작스레 휴교를 할 정도로 하얗게 폭설이 내렸지만, 눈밭을 걸어 나가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옷을 잘 챙겨 입으라고 무뚝뚝하게 말한 뒤 앞장서서 길을 걸었다. 눈 때문에 길은 적적했고, 차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길을 함께 걷던 아이는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며 내 옆에 다가왔다. 나는 불안해하는 아이에게 그럴듯한 대안을 줄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명료하게 답해줄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해명하고, 책임져야 할 일은 감당해야 한다."라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수긍을 했는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내 얼굴을 살피더니 괜찮냐고 물었다. 엄마를 걱정시켜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괜찮다. 발이 시린 게 문제지" 우리는 눈과 물이 섞여 슬러시가 돼버린 길을 걸으며 신발이 모두 젖어 버리고 말았다. 아이는 도저히 참기 어려웠는지 “엄마, 정말 미안한데 나 먼저 갈게. 발이 시려서 견딜 수가 없어. 미안해. 진짜 미안해”라고,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뛰어갔다. 녀석은 토끼처럼 순식간에 눈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오후에는 별일 없다는 듯 자기의 일정을 소화했다.


다음 날 우린 모두 각자 할 일을 했다. 나는 새벽 기차를 타고 대구에서 하는 전시회를 보러 내려갔다. 다행히 대구는 눈이 오지 않은 맑은 날씨였다. 차가운 아침 공기가 얼굴에 닿으며 정신을 맑게 해 주었다. 전시를 보며 어제 있었던 아이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거나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마음에 담겨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감당할 수 있는 크기였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에 불필요한 요란함도, 부모의 도리에 과잉하여 심취할 이유도 없었다.


저녁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기차에서 반실신 상태였다. 옆에 지인이 있었지만, 이야기를 나눌 기운이 없었다. 기차에서 내릴 때쯤 먼저 퇴근한 남편에게서 불평에 가득한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집에 일이 생겼는데 애도 엄마도 너무 이상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상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대응할 것은 대응하고 감당할 것은 감당하면 되는 일이었다. 늘 하던 일을, 예정된 일을 할 뿐이었다. 불안해하는 남편을 달래주고 난 후 평온함을 느꼈다.


평온함과 함께 내게 찾아왔던 행복한 날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별로 대단하지 않은 날이지만 특별했던 날들이 아른거렸다. 엄마와 함께 목욕탕을 다녀온 후 바나나 우유를 먹던 어느 겨울날, 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오가던 일상적인 날, 하굣길에 나를 보며 뛰어와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던 아이의 날리는 머리카락, 그의 등에 기대어 나의 불안한 심박을 잠재웠던 순간, 함께 대화를 나누며 깊은 눈빛으로 서로의 시간을 완전히 일치시켰던 순간, 차 안에 나란히 앉아 옆구리 쿡쿡 찌르며 우리만의 재즈 선율을 만들어 가던 순간, 미술관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음악의 진동과 함께 하늘로 붕붕 오르던 순간...


대단하지도 않은 수많은 찰나의 시간, 아마도 죽기 직전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장면들, 지극한 평온함을 선물했던 하루. 너와 나의 주파수가 일치된 순간에는 극한이 평온함이 찾아왔다. 너와 나의 경계가 없어지는 순간, '나'라는 한계를 너머 '자연'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평온함의 순간 나는 다른 내가 될 수 있었다. 그토록 망설이고 애원했던 순간이 바로 평온함의 순간, 다름 아닌 사랑의 순간이었다.


나는 일상을 잘 가꾸어 나가고 싶다. 나의 일상을 통해 너에게도 안정된 일상을 느끼게 하고 싶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아니라, 숙제처럼 치러내야 하는 하루가 아니라, 폭우와 땡볕을 강건하게 견디고 따스한 바람도 기꺼이 즐기는 일상을 선물하고 싶다. 그 속에서 '너'는 '너'답게 자라나겠지. 그리고 '나'도 그 어디에선가 '나'답게 살아가겠지. 대단하지 않은 날, 찬란한 빛을 느끼며 그렇게 살아가겠지. 평온함이 깃드는 순간 '너'는 '나'를 기억하겠지. 그 순간 우리는 같은 시간에서 다시 만나게 되겠지. 그렇게 우리 경계가 사라진 시간 속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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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정희주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소속 미술치료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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