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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ven Oct 28. 2019

직장인의 독후감

'영원한 이방인'을 읽고.

[영원한 이방인(Native Speaker) - 이창래 지음]을 읽고



선택의 배경


스물, 그리고 아마 한 두 살쯤, 아직 학생이었을 때 나는 돈이 없었다. 돈이 없다는 것으로 마음이 퍽퍽하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인 충당을 위해서 이런 저런 아르바이트를 꽤나, 그리고 열심히 반복적으로 했다. 성실해야 성공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거나, 세상이 다 싫어서 돈이나 벌자는 체념은 물론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라도 시간을 보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길, 그러니까 도서관 건물 1층을 가로질러 가던 날 「교내 독후감 공모전」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도 알베르까뮈의「이방인」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책을 선택한 나는 읽은 김에 독후감을 써서 제출했고 급기야 입상 정도는 해서, 친구들과 하룻밤 술 판을 벌이고도 일주일은 버틸 만한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시상대에 오르기 전날 주관 교수님의 말씀으로는, 매년 하는 공모전에서 국문학과나 문예창작학과 외 다른 학과 학생이 지원한 것은 역대 두 번째라고.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제와 ‘이방인’이라는 책의 세밀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어떠한 내용으로 독후감을 써서 제출했는지는 더더욱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다못해 제출했던 파일도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몇 개의 단편적인 기억은 가지고 있는데, 주인공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낯설었다는 것 - 물론 그 책에 나오는 모든 분위기와 지명, 혹은 이름이 다 그랬다 - 그리고 어디선가 의미도 모른 채 반복적으로 들어봤을 ‘부조리’와 ‘소금’정도... ‘소금’은 당시 내가 독후감을 쓰면서 일부 사용했던 단어였다. 내용 중에 빛이라는 단어도 나왔었던 것 같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페이지에 ‘소금’이라는 단어도 나왔겠지. 나는 그 두개를 엮어서 ‘단지 그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 같은, 조금은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정도의 내용을 버무렸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대단한 존재가 되기에는 이미 틀려버렸다는 것을 알아도, 빛과 소금, 아니 그보다도 그저 세상을 살아갈 만큼 단단한 존재이고 싶어하지 않을까. 나는 그랬다. 그 시기에 나는 ‘성공 해야지’ 보다는 ‘취업하고 싶다’가 삶의 목표였으니까. 어딘가로 출근해 무언가에 쓰이고 싶었으니까.



선택의 이유


알베르까뮈의 ‘이방인’을 읽고 독후감을 쓴 게 스물. 지금 나는 딱 마흔이 되었다. 12월 생일 탓에 항상 ‘만 나이로’ 두 살 남짓을 줄이는 어머니의 계산법도 있지만, 나는 누가 뭐라해도 마흔이 되었다. 스물 즈음에 읽었던 ‘이방인’이 마흔이 되었을 때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돌아왔다. 계시일까.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스물에 읽었던 이방인은 아직 그의 삶을 청산하지 못하고 ‘영원한’이방인이 되어 돌아왔을지도.


어쩌면 이방인이라는 삶은, 스무살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취업을 하고 나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늘 앞으로 나아가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혼자 뛰면서도 늘 조급했다. 앞서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으므로, 결국 뛰지 않았으면서 혼자 뛰고 있다는 생각이 가득했으므로, 나는 늘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다. 누군가는 그 조급함을 단단함으로 봐 주기도 했지만, 적당히 한 번 으쓱할 뿐, ‘나만 뒷쳐진다’는 느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방인(異邦人)’을 풀어 얘기하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한다. 반대로 ‘이산(離散)’은 ‘다른 나라로 떠난, 흩어진’사람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조금 거칠게 생각해 보자면, ‘이방인’은 내 영역으로 들어온 다른 사람, 내가 낯선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인데 비해, ‘이산인’은 내 영역에 있던 사람들이 남의 영역으로 떠난, 안타깝고 그립고 힘내라고 응원하는 관점이 느껴지는 단어이다.- 실제 뜻이 어떻든 -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조, 어감과 이산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것이 나에게는 살짝 차이가 있다.


‘영원한 이방인’이라고 하는 이 책, 그러니까 제목이 끌렸던 건, 이렇듯 제목에서 오는 나만의 어감, 느낌 때문이었다. 알베르까뮈의 ‘이방인’이라는 책을 읽었을 때 주인공의 삶은 내 영역에 들어온 낯선, 솔직히 잘 어울리고 싶지 않은 상대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슬픈 상황이라고는 하나 지나치게 침울했고, 그런 탓인지 주변의 모든 상황이나 환경들도 어둡기 그지없었다. 내가 안타깝게 바라봐야 하는 어둠이 아닌, 내가 마주하고 당연한 듯 보듬어야 하는 어둠,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게 힘겨웠던 것 같다.


지금의‘영원한 이방인’은, 이방인이라고는 하지만 철저하게‘이산’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았을 때, 그가 느낄 이방인으로서의‘낯섦’은 철저히 그의 몫이었다. 책을 읽고, 그의 삶을 들여다볼 나에게 그는 더 이상 내 영역에 들어온, 내가 함께 지낼지도 모르는 ‘낯선’이가 아니라, 나와는 너무 유사한, 그러면서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는, 타지의 그들에게 낯선 이방인일 것이기 때문에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것이라고 여겼다. 한 마디로 내가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종류의 아픔일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보듬지 않아도 되었다. 나에게 그것은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보다 더 가까운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에 대한 이야기


책을 중반정도까지 읽은 후부터는 ‘이 말은 꼭 서두에 써야지’하고 내내 되새긴 것이 있다. 나는 정말로 이 책이 읽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책을 중반까지 읽는 내내 내용 상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 물론 칼국수를 맛있게 끓여 주시던 그의 어머니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낯선 아줌마를 집에 들였으며, 여전히 영어로 떠듬떠듬 이야기를 할 때 빼고는 지극히 가부장적이었고, 어린 미트는 너무도 허망하게 생을 마감했으며, 유난히 몸의 온 마디 마디가 쭉쭉 뻗은 릴리아는 아들이 죽은 후로 섬으로 가출을 감행했다는 것, 스파이 신분으로 만났지만 친구가 되고 싶었던 정신과 의사 루잔의 죽음이나, 그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로 그에게 몰두하게 만들었던 한국계 시의원 존 강까지. 그에게는 이런 저런 일들이 (응당 소설이 그래야 하 듯) 일어나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작가는 내 생각에, 누구의 죽음도 슬플 만큼 무겁게 이끌지는 않았으며, 그에 따라 주인공의 내레이션은 차갑지 않을 만큼만 차분했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그것이 소설이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 아무튼 내게 이 소설은 읽기가 어려웠다. 읽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책이 내게 문제의식을 충분히 던지지 않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고, 어디에도 내가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러니까 내가 사전에 ‘이럴 것이다’라고 정해 놓았던 울타리 안의 문제의식이 아니었다. 되 짚어 보건 데, 나는 언제든 그 문제의식에 관해서 생각해 볼 준비가 되어있었다. 내가 울타리 안에 고이 모셔 두었던 문제의식이라는 것은, ‘이방인’과 ‘이산’에 대한 것, 편견이었다. 낯선 외국에 내몰리다시피 하여 자리잡고 그 안에서 겪는 각종 이민자로서의 차별과 삶, 경제적인 궁핍, 문화적인 모욕, 정치적인 배제, 범죄상의 노출 등 그 시대를 살아가는 면면(面面), 그리고 ‘그래도 내일은 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는 식의 결말.


그런데 이 책은 끊임없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기대했던 내용이 나오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느낌 이전에 어렵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걸까? 나는 책을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뒤적여보았다. 내가 놓친 부분은 없는지, 혹은 등장 인물 특성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는 게 맞는지. 그리고 생각의 방해가 될까 싶어 미뤄두었던 리뷰를 미뤄두는 게 맞는지. 그러다가 차츰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먼저, 책의 화자가 이야기하는 방식이 상당히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사건의 흐름대로 정리되는 것이 아닌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 별로, 아니 그때 그때 생각나는 대로 화제를 바꾸는 느낌. 다른 주제 속에서 이야기를 풀면서도 굳이 불쑥 불쑥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추억으로 빠져들었다가 호감을 느꼈던 상대인 루잔과의 대화가 스친다. (특히 잠깐의 스토리로 마감되는가 싶던 닥터 루잔과의 대화, 그에 대한 감상은 곳곳에서 베어난다.) 잠깐 생각하듯이 내뱉는 이야기라면 상관없을 텐데 챕터가 달라질 때 시간 순서가 뒤바뀌는 게 예사다. 예를 들면 (비교적 앞부분에 릴리아와 어떻게 만났는지 설명하는 이야기를 제외하면) 릴리아가 섬으로 떠난 내용은 가장 앞에 배치되고, 섬에서 돌아온 다음의 이야기는 중반 어느쯤에,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아들의 죽음이나 죽음 이후 상황, 그리고 다시 죽기 전 즐거웠을 때 나눴던 대화 같은 것이 사이 사이에 배치되는 식이다. 나는 지금 솔직히 말하면 이 구조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을 읽는 동안 역사의 단서를 찾느라 신경을 곤두세웠으면서도 여전히 시간의 흐름대로 잘 정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전에 내가 기대했던 사건이나 묘사, 즉 그러니까 이민지로서의 불안한 삶이 생각했던 것만큼 표현되지 않아서, 그런 식으로 기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흐름에 대한 자연스러운 몰입을 방해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으로 발견한 것은 제목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Native Speaker’라고 한다. ‘모국어’라고 하거나,‘영어를 모국어처럼 꽤나 잘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흔히 사용하고, 또 인식하고 있는 말이다. 사실 ‘발견’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선택할 때 스치듯 이 원제를 본 적이 있으나, 원서를 읽을 게 아니므로 기억에서 배제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의 원제에 눈길이 간 것은 내용 상 간간이 숨겨진 보물이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것처럼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어쩌면 더 적절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잠시 덮고 얼마 전 읽다가 잠들었던 다른 책 한 권을 다시 폈는데, - 그 책 안에서 ‘언어’에 대해 무심코 메모해 놓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에 - 미국의 노암촘스키가 쓴 『촘스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책이었다. 내가 읽기에는 책이 어려워 전체를 탐독하지는 않았지만, 태블릿 안에 메모해 둔 몇 개의 구절이 있었는데 「언어 구조는 무의식적으로 습득되는 선천적 지식(com-petence)」이라는 구절과 「인간이 하등 동물과 다른 유일한 점은 대단히 복합적인 소리를 생각과 결부시키는 능력이 거의 무한정 더 크다는 것이다(다윈)」, 또 「...근대에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감수성 습득이 최근에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새로운 감수성을 표출하는 데는 우리의 근대적인 모습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단 한 가지, 바로 언어의 발명이 거의 확실한 계기로 작용했다」 등이었다. 물론 내가 이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지 않은 채, 그러니까 스크랩한 내용의 앞 뒤 연결 내용,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그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는 이유로 스크랩한 것이기 때문에 촘스키의 의도와 맞닿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Native Speaker』라는 이 책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로서 작용한 내용으로 이해할 뿐이다. 촘스키 책에서 뽑은 세 가지 구절을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습득되는 선천적 지식이다. 선천적으로 습득된 언어는 생각과 결부되고, 감수성을 표출하는 것 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언어를 후천적으로 배우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인 습득 과정이 일어날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국적인 생각과 결부될 수 없고, 그들 만의 감수성을 표출하기도 어렵다.』


우리와 그들이 다르다고 이야기할 때마다 ‘생김새’를 이야기하고 ‘문화’를 이야기하지만, 끊임없이 지적되고 화제가 되는 건 어쩌면 ‘언어’가 아닐까?


그제서야 작가는 나에게 이야기한다. “언어의 힘, 우리가 누구인지 또 우리가 타인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규정하는 그 힘을 살펴보는 동시에 한껏 즐겨보자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이것이 크나큰 갈망이 담긴 소설이라는 것. 자신을 이해할 방법을 찾고자 하는 갈망, 진정한 ‘모국’어를 찾고자 하는 갈망, 고향을 떠난 곳에서 고향을 찾고자 하는 갈망. 이것이 결국 예술적이고, 은밀하고, 또 늘 신비한 갈망일 수도 있겠다.”


릴리아는 – 헨리 파키에 대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릴리아는 – 그를 규정한다. ‘낯선 사람’, ‘불법 외인’, ‘황화’, ‘파파 보이’... 그리고 다른 한 마디가 발견되게 덧붙인다. ‘언어를 엉터리로 말하는 사람’. 이 무수한 말들을 나는 나의 언어로 표현해내지 못한다. 나는 느낄 뿐이지, 유려한 언어로 화려한 수식어로 표현할 재간은 없다. 하지만 결국 언어다. 그들과 닮아지는 첫 번째도, 그들과 구별되는 첫 번째도 결국 언어다.

아니, 사실 이 보다 곱씹은 릴리아의 말이 있다.


“얼굴도 방정식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그쪽이 생각하는 방향과는 좀 달라요. 자기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표정이 보이는 것이거든요. 자기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거예요. 나더러 맞추어 보라고 한다면 그쪽은 원어민이 아니라는 쪽에 걸겠어요. 아무 말이나 해 보세요.”


나는 마지막의 ‘아무 말이나 해 보세요.’라는 문장에서 특히 눈을 뗄 수 없었다. – 아직도 기억난다. 나는 만원 지하철 출근 길이었다. - 말이 어눌하다거나 특정 단어의 세밀함, 파생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 아닌, ‘표정’의 다름을 이야기하면서, 아무 말이나 해 보라고 말하는, 언어를 이야기하는 릴리아를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좀 다른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즐겨 듣는 - 웃음 중심의 - 팟캐스트에서 북미정상회담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게스트로 미국, 일본, 중국 등 각 나라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들을 초대했다. 주요 내용은 미국 대중들의 반응은? 일본 대중들의 반응은? 이라는 것이었는데, 아이러니한 것이 그들의 반응이었다. 이미 그들 중 절반 정도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이었는데 – 물론 그들은 한국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외국인으로 그 나라에서 태어났다. – 그들, 그러니까 한국 국적을 취득한 그들이 대화 중간에 내뱉은 말이, “우리도 한국인인데 외국 얘기를 왜 우리에게 묻냐, 우리도 인터넷 댓글 보고 말하는 거다”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들과 내가 전화 통화를 했다면, 나는 그들이 외국인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후 이어지는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몇 가지 눈에 띄는 지점이 있었는데, 그들의 언어 속에 한국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 오래 살았지만 ‘한국인들은 이런 걸 싫어하지?’ 하고 자기도 모르게 되 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행자도 마찬가지였다. 상대를 막 대하는 것이 컨셉이었던 진행자도 그들에게는 한없이 조심했다. 한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그 나라만의 감수성은 언어의 발달과 관련이 있고, 언어의 구조는 무의식적으로 습득되는 선천적인 지식」이다.

존 강은 영어에 능숙하다. 우리가 말하는 원어민 수준이다. 아니, 우리가 보기에는 그냥 미국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시의원이며 시장에 출마까지 한 사람이다. 또 일례로 한국인 상점 주인과 흑인 손님이 대치중일 때도 여유롭게 문제를 해결한다. 흑인은 그가 이 부근의 다른 한국인들과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존 강이 살던 집을 소개하던 부동산 중개업자는 간단하게 그를 정리한다. “외국인이에요,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어요”

헨리는 어떠한가. 어머니에게 서투른 영어로 욕을 하던 아버지를 상대로 유창한 영어를 날리는가 하면, 이어 아버지의 틀린 발음을 듣고 자기 방으로 올라가 한껏 비웃는다. 아직까지 발음하지 못하는 몇 몇 단어가 있기는 하지만(vent/bent), 옆에서 알아채지 못할 만큼의 훌륭한 억양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미국에서 한국인으로 살기 어렵다’는 아버지의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닥터 루잔이 그에게 묻는다.

“젊은 친구, 당신은 평생 누구였습니까?”



탈고(脫稿)


독후감에도 탈고(脫稿)라는, 고상하고 멋져 보이는 그 말이 가당하기는 한 걸까? 원고(原稿)라는 말을 찾아보니 ‘인쇄하거나 발표하기 위하여 쓴 글이나 그림’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독후감인 나의 글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어쨌든 마감일인 3월 24일, 오늘까지 이 글을 부여잡고 있었고 끝내 마무리를 짓는 중이다. 정확히는 기억 나지 않지만 공모전의 안내문이 공표된 게 1월이라고 하니 나에게도 두 달이 넘는 매달림의 시간이었다. 좀 더 지나치게 말하면, 한 해의 한 분기를 책 한권으로 도배한거나 다름없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또 어떠한가. 벌써 듬성듬성 2주는 넘게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이에 나는 책을 한 번 더 읽었고, 이것도 모자라 밑줄 그어 놓은 몇 십 구절을 들춰가며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머리를 싸매기도 했다. 이쯤 되니 내 스스로 감히 사용하지 못할 ‘원고’라는 단어는 아니더라도 ‘탈고(脫苦)’라는 정도는 부여해주고 싶다.


나는 데이터를 가공하고 분석하는, 그래서 상대방에게 필요한 결과를 내 주는 일을 하며 먹고 산다. 지난 십여 년 간 늘 그랬다. 데이터의 분석이라는 것이 해석이고 해석은 데이터를 읽어서 분석가로서의 나의 견해를 덧붙여 설득하는 일이므로, 그것 역시 어쩌면 읽은 후의 감상을 전하는 독후감이다. 하지만 데이터를 읽는 것과 글을, 그것도 작가의 의도와 정신이 깃든 소설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글을 읽을 기회는 많아도 그 글을 읽고 무언가 쓸 기회는 거의 없었던 것이 이유였을까? 아니면‘의도’와 ‘정신’을 담아내는 기능이 없는 컴퓨터와의 치열함이 이유였을까? 읽는다는 것이 정말 녹록치 않구나 매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고통은 생각과 정리의 고통이었던 것 같다. 생각은 이해와 공감과 파악에 대한 고통이었다. 헨리가 겪고 있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시대를 살지 않았어서, 혹은 내가 그러한 환경에 놓여있어 본 적이 없어서 이해와 공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 보다는, 작가의 글이, 잔잔하게 벌어지는 이런 저런 사건과 상황에 이방인으로서의 낯선 삶이 가려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겪고 있는 저 잔잔한 이방인의 삶은, 그러니까 어디인가에 덜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 그래서 때때로 제3자처럼 한 발짝 물러서 관망하듯이 읊조리는 어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떤 사람이든 한 번씩 느끼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 부분이 어려웠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헨리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또 작가 이창래씨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면서도 나는 어쩌면 내가 온전히 그의 글을 받아 마시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으로 뒤덮였다.


낡은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려놓고 잠시 다른 일을 하다가 순간 잊어버렸을 때. 물이 다 끓었는지 모르다가, 아차 싶어 커피 포트 앞에 가면 뜨거운지 확인하기 위해 검지나 중지 끝으로 커피 포트의 쇠로 된 몸통을 톡, 톡 건드려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전해오는 손 끝의 뜨거움을 정보 삼아 ‘아직 차를 우려먹을 만하다’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이 책을 읽었던 내가 어쩌면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헨리가 겪는 삶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산문학의 취지를 딱 그만큼만, 손 끝에 뜨거움이 스칠 정도만 느끼고 돌아서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나도 누군가처럼 거칠게 떠오르는 길고 긴 생각들을 몇 단어로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단어들을 많이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단어들이 아주 많이 멋있었다면. 조금 더 간결하고 조금 더 깊이 있게 나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텐데. 아니 그 보다, 나의 생각들이 좀 더 정리되어서 내 안에 오래도록 자리할 수 있을텐데. 아마도 20년이 더 지나, ‘영원한 이방인2’, ‘돌아온 이방인’정도를 읽게 될 때 쯤에는 혹시 모르겠다.


겨울이 끝났고, 봄이 시작되었다. 누구라도 느끼는 계절 속에 나는 나를 여전히 두고 있고, 차분하게 하루를 살아간다. 아무 일도 크게 일어나지 않고,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매 순간 어디인가에 긁히면서 스스로‘이방인’이라는 생각 속에 살아가기도 한다. “언어를 엉터리로 말하는 사람”그를 향한 릴리아의 그 말이 지금은 나에게도 여운을 남긴다. 그 한 마디면 되었다.



어쨌든 나는, 탈고(脫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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