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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두만 Nov 11. 2022

기념일

인위적인 날들과 자연적인 날



  100일, 200일, 1년 … 연인들이 사귄 날짜 혹은 결혼기념일 등, 대부분 기념일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인위적으로 상정한 날들이다. 특정한 사건이 일어난 날을 잊지 않도록 특별한 상징성을 부여한 것인데, 그와 반대로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정해지는 기념일도 있다. 바로 생일이다. 생일만큼은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정해진다. 생일은 내 탄생에 앞서 선포되는 국가기념일과 달리 내 현실 속에서 와닿는 첫 번째 기념일이다. 불혹, 환갑, 칠순 등, 특정 나이를 기념하는 이칭은 모두 자기 자신의 생일을 기반으로 하는데, 내가 태어나는 순간을 자의로 영향을 끼치기란 불가능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생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걸 수도 있겠다.


  생일이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라면 기일은 죽음을 추모하는 날이다. 생일과 기일 모두 개인을 기억하는 날이지만 그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생일이 산 자의 생명력이 활발한 날이라면 기일에는 망자의 장엄함과 엄숙함이 가득하다. 생일은 연차가 쌓일수록 단단해지고 기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진다. 기일에는 주년, 주기 따위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다만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는데, 산 자에게는 남은 시간이 값지기에 순간을 기념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만 망자에게 남은 시간은 헤아릴 수 없기에 영향력이 희미해지지 않나 싶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생일 대신 기일이 그 사람을 기념하는 날이 된다. 생일과 기일은 양립할 수 없어서,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일련의 과정에 놓여 있지 않고 독립된 구역으로 각자 존재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넘어간 것들을 그리워할까.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 진의에 닿지 못한다. 산 사람은 죽어본 적이 없어서 망자를 헤아릴 수 없고, 닿지 않는 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끝내 무뎌지고 만다.


  개똥을 치우며 전화를 받은 아빠는 오늘이 할아버지의 기일이어서 반차를 쓰고 일찍 집에 왔다고 했다. 인간의 생로병사와 짐승의 먹고 싸는 일이 대체 무엇이 다른가. 아버지 기일에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는 아빠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해서, 개똥을 치우는 일과 할아버지 제사의 무게가  다를  없어 보였다. 당연하게 받아들일  없는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일상에 자리 잡은 사건들은 당사자가 받아낼 만큼 풍화되고 나서야 겨우 안착된 것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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