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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 별 Oct 31. 2023

나의 히어로

나는 그때 이 사람과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는

급기야 큰 싸움으로 번졌다.


"아이 운동회 때 만약 바빠서 못 가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라는 질문이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의 대답의 요는 이랬다.

못 가면 어쩔 수 없지 뭐,

일이 바빠서 못 가는 걸 이해해야지.

모든 행사에 다 참석할 수는 없잖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원한 답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내 아이의 아빠가 되는 건 싫었다.


만약 나라면

아이 운동회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하려고 했을 것이다.

일정에 맞춰 일을 미리 하던가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미리 양해를 구해 놓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참석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했을 것이다.

내가 이러니까 나의 남편 될 사람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싸움을 걸었다.

그런 마인드의 아빠를 가진 아이는 불행할 것이라며 막말을 해댔고

나는 있지도 않은, 일어나지도 않은, 그저 가정이었을 뿐인 질문 하나에 대노를 하고 말았다.


그는 이 일을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기억한다.

결심과는 다르게 그와 결혼하기는 했지만.


첫째 아이 첫 소풍날.

그는 미리 연차를 냈고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싸고

소풍에 가서는 열심히 아이와 뛰어놀았다.


7살이 된 첫째 아이가 어린이 집에서 지금까지 한 학부모 행사에 그는 거의 모두 참석했다.

내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그는 적극적으로 스스로 참여했고 또 즐겼다.


그날의 싸움이, 그날의 그의 대답이

참 무색하게도

그는 내가 원하는 아빠상이었다.


아빠가 된 그를 보고 있으면

첫째로 드는 생각은 참 신기하다는 것이다.

그가 27살에 우리가 만났다.

아빠가 된 그를 상상했던 적은 있어도 진짜 현실이 될 것이라고 짐작은 못했던 것 같다.

리얼로 아빠가 된 그를 보고 있자면 언제 어떻게 이렇게 되었지 하면서 신기하다.


그다음으로는

이 사람이 우리 아이들의 아빠여서 정말 다행이다.

참 고맙다

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나보다 세심하게 꼼꼼하게 차분하게 하나하나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굳이 아이에게 저렇게까지 한다고? 할 정도로

자세하게 알려준다.

희한하게 아이는 그걸 알아듣고 또 알아간다.

그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아이의 세계가 넓혀지는데 그가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과 진심을 다해 재미있게 논다.

나는 그냥 놀아준다, 놀 때 옆에 있어준다에 가깝다면

그는 정말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다.

그 모습이 나는 정말 사랑스럽다.

모래놀이를 하면 지나가는 아이들이 모두 '이게 뭐야?' 할 정도의 뭔가를 만들고

씨름을 하고 레슬링을 하고 태권도를 하고... 몸으로 치고받으며 아이들과 한 데 엉켜있으면서 웃고 있다.

아이들이 추는 춤을 따라 추며 앙증맞고 유치하고 교태스러운 몸짓도 서슴없이 하고

온갖 공놀이, 보드게임, 전통놀이 등등 이 세상의 가지각색의 놀이란 놀이를 몽땅 아이와 하고 있다.

나는 그저 놀랍다. 그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미안하게도 나는 '이따 아빠 오면 하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여기까지만 보면

완전무결한 아빠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도 아빠가 처음이니까 그리고 그도 사람이니까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잘못도 있었고

육아에 지쳐하기도 하고 힘들어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가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느낀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둘째 아이가 장난감을 갖겠다고 떼를 쓰니까

그가 첫째 아이에게 양보를 강요했다가

첫째 아이가 설움을 참지 못하고 방에 들어가 울었다.


그는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린 첫째 아이의 행동에 그도 조금은 화가 났었나 보다.

그런데 나랑 이야기하면서

첫째의 입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그는 자신의 행동을 다시 돌아봤다.

그리고 첫째에게 가서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서운한 첫째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왔다.


그가 아빠로서 성장하고 있다.

그는 이제 미안하다고도 먼저 말하고 아이의 마음을 살펴보기도 한다.

이제는 내가 그에게 '이렇게 했어야지' 하며 타박하지 않아도

스스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행동한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감사한다.

당신이 우리 아이들의 아빠라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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