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눈이 일찍 떠진 김에 바로 미적대지 않고 그냥 출근 하기로 했다. 집에 홀로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들, 마음만 답답해질 뿐일테니.
배도 고프지 않아 카페에서 간단히 토스트나 해 먹을 요량으로 끼니도 거른 채 터덜 터덜 집을 나서는데 전화기 진동이 느껴졌다.
그일까?
정리 되지 않은 갑작스러운 이별은 사고처럼 닥쳤고, 생각보다 멀쩡하게 반년의 시간을 보냈는데 이제와서 다시 이별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세상에 공짜로 얻는 것이 하나도 없다더니 공짜로 잃는 것도 없는 걸까? 내가 너무 쉽게 그를 잃은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천천히 그를 잃기 위해 시간과 노력과 감정을 쓰라는 뜻일까?
하지만 화면 속 전화번호는 본적이 없는 번호였다. 스팸번호라는 안내도 뜨지 않았다. 잠시 망설였지만 별 다른 경계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언니."
동생이었다. 집을 나오면서 집안의 모든 구성원들의 번호는 모두 차단했는데 이 번호는 동생의 번호가 아니었다. 낯선 번호라 경계심을 푼 것이 잘못이었을까?
"......"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 말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유야 어쨌든 나는 도망을 친 것이고 내가 지고 있던 짐은 아마도 그 아이에게로 옮겨갔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안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미안했다.
......미안했다. 미안한 감정이 목끝까지 차 올랐다.
"미안해."
그녀가 먼저, 말했다. 미안하다고.
"......뭐가?"
"전화 한 거."
"......"
우리는 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 번호야? 전화번호 바꿨어?"
"......아니."
"그럼?"
"언니가 우리 전화 안 받잖아. 차단한 거 같아서 친구 전화 잠깐 빌렸어. 그래서 금방 끊어야 돼."
"......"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내 유년시절과, 청년시절 모두가 너무 힘겨웠고 지겨웠다. 그녀는 아마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밑의 동생들 모두, 살아온 모든 순간을 통틀어 단 한 순간도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 조차도 아마 나를 의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의지가 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언니가 왜 그랬는지 알아. 이해해."
"....."
정말?
"우리도 알아. 평생 언니가 엄마 대신이었던 거. 엄마가 엄마답지 못했던 거."
"......"
"그리고 우리가 알면서도 언니에게 의지한 거. 엄마를 원망하고 싫어했지만 우리도 언니에게는 똑같은 사람이었을 거라는 거. 그래서 그랬다는 거."
"뭘 그래?"
"버린 거. 우리 버린 거. 왜 그런 건지 알아. 그리고 이해해."
동생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는 중간 중간 끅, 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해는 하는데, 그래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지는 않을 건데, 그래도 우리 그렇게 버리지 말아주라. 언니는 우리를, 아니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래도 언니가 나를 모른척 하면서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엄마한테는 언니랑 연락 하는 거 안들킬게. 진짜야."
엄마를 제외하면 나와 가장 오래 살았던 가족이자, 서로 다른 아빠를 가지고 있고, 둘 다 아빠의 얼굴을 모른다는 공통점을 가진 둘째는 한 편으로 나와는 참 다른 인간이었다. 그녀는 마음이 약했고, 나에게 의지하긴 했지만 언제나 가장 나에게 미안해 한 사람이었다. 뻔뻔한 엄마나 철없는 다른 동생들이 어린 나에게 본인들의 부양을 당연히 요구하거나 깊은 속사정을 모르는 척할 때에도 미안한 표정을 짓고 고맙다고 얘길하고, 조금이라도 내 짐을 덜어주려 했던 아이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철이 빨리 들거나, 죽을 때까지 들지 않거나, 극단적으로 둘 중 하나로 자라기 마련인데 그 아이와 나는 전자에 속하는 타입의 인간들이었다. 다만 나에겐 그들을 다 떨쳐버리고 떠나버릴 마지막 용기가 있었다면 그녀에겐 아마도 평생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약간 물러터진 마음 한 조각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을 것이다.
나라면,
나였다면 그렇게 버리고 떠난 언니에게 전화까지 빌려가며 연락해 보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과라니. 사과를 하기 위해 전화를 하다니.
"어떻게 지내? 다들 학교는 다니고 있지?"
"가긴 해. 하지만 서로 묻진 않았어. 학교를 가는지, 다른 곳엘 가는지 확인 해 보진 않았어."
"너는?"
"가. 지금도 학교 친구에게 전화를 빌린거야. 그냥 좀 견딜 수가 없었어.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연락이 끊어져버릴까 봐 무서웠어."
물러터진 마음의 한 조각같은 말이다.
"학교 빠지지 말고 꼭 가. 공부도 꼭 해. 밥은 굶더라도 학교는 꼭 가고 공부도 해. 수업 절대 빠지지 말고. 무슨 말인지 알지? 알바한다고, 돈 번다고, 집안 사정 안된다고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 갈 생각만 해."
"......"
"내가 등록금까지는 어떻게든 마련해 볼테니까. 연락이 되지 않아도 그건 어떻게든 해줄게. 그러니까 넌 현재를 살지 말고 미래를 살아. 엄마나 다른 동생들한테 네 몫 아무것도 뺏기지 말고, 대신 해주지도 말고. 네것으로 생긴 건 무조건 네가 가져. 어?"
나 처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당하지 말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이기적으로 말이야.
"언니 무서워. 나.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집에 가도, 방에 식구들이 가득 차도 혼자만 있는 것 같아."
"나도 그래. 그건 누구나 그래."
전화기 넘어로 수업 시작을 알리는 벨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언니. 나 이제 끊어야 돼. 다음엔 내 전화로 전화할게. 나 꼭 받아줘. 응? 자주 안할 게. 너무 춥고 혼자인 것 같은 때만 할게. 꼭 받아? 응?"
나에겐 없는 무른 마음 한 조각.
없는.
나에게는 없는.
없는.
"......알겠어."
길고 조용한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나오며 나는 내가 동생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그녀의 나이었을 때의 나에게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녀 때문이 아니라 그녀에게서 보인 나의 모습 때문에 내가 더 냉정해질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것이어서 그런 바보같은 소릴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태어난 둘째는 거의 내가 키우다시피 했던 아이였다. 원래도 나에게,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는 일에 별 관심이 없었던 엄마는 둘째를 낳은 후에는 본격적으로 더 본인의 자녀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기 시작했다.
둘째의 생부는 엄마가 만삭이 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와 엄마가 연애를 하던 시절 딱 한번 스치듯 그를 본적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아마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엄마보다 훨씬 어려보였고 훨씬 철이 없어보였다. 그때의 엄마보단 나와 나이차가 더 덜 나보였으니 어쩌면 대학생 쯤 나이었을지도 모른다.
철도 없지만 현실에 대한 감도 없었던 엄마는 진지하게 그 남자와의 미래를 꿈꾸기라도 한 걸까? 둘째를 임신하고 한동안은 꽤 신나 보였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새아빠 생기면 니가 잘 해야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새아빠는 커녕 자기 아이의 아빠도, 엄마의 남편도 될 생각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더니 아예 이사를 해버렸다. 종종 그의 집에서 자느라 하룻 밤 정도 집에 들어오지 않던 엄마가 그를 찾아 한 일주일 정도를 집에 들어오지 않더니 찾을 길이 없었는지 눈물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돌아와 내리 이틀을 잠만 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곤 금방 평소의 엄마로 돌아갔다. 임산부였지만 함부로 먹고, 마시고, 내가 볼때마다 말렸지만 몰래 담배도 피웠다. 나는 곧 태어날 둘째가 너무나 걱정이 됐다. 이런 집에 혹시라도 기형아나 지능이 떨어지는 아이가 태어나면 어떡하나. 누가 그 아이를 책임질 수 있을까 몇 달을 두려움에 떨었다.
당시만 해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할 것처럼 너무나 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났고 나는 그 해 겨울 방학을 내내 엄마의 산후조리와 신생아 돌보기와, 나까지 세명을 먹여살릴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모조리 '바쳐야' 했다. 학교 친구들은 모두 이제 입시를 시작해야하는 고등학생이 된다는 설렘과 걱정에 선행학습을 위한 학원이나 과외를 시작하고 또 그런 이야기들만 나눴지만 나는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사이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아이에게 아무런 애정도, 관심도 없던 엄마를 대신해 인터넷을 뒤져가며 아기들이 맞아야할 예방접종을 알아내고, 한 부모 가정이 받을 수 있는 온갖 지원들을 찾고, 밤 새 놀다 들어와 뻗어버린 엄마를 거의 들쳐 업다시피 데리고 보건소며 주민센터며 구청 등을 다녔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엄마를 보고 혀를 찼고 나와 동생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키웠던 아이였다.
첫만남에서부터 그녀에게 애정을 가질만한 이유도 여유도 없이 그냥 짐처럼, 과제처럼 주어진 아이였지만 나는 그녀를 키웠다. 엄마를 대신해서.
셋째와 넷째가 생기면서 둘째도 함께 커 갔고 나와는 조금 다르지만 그녀의 모습은 내가 거쳐온 것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았다. 전쟁터 같은 집안에서 어떻게든 대학에 가기 위해, 내 몫을 챙기기 위해 몸부림칠 때 나를 대신 해준 것도 둘째였고 코피 터져가며 벌어온 내 아르바이트비를 보며 쉽게 손바닥을 내밀던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며칠이나 끙끙대며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부탁을 하던 것도 둘째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고민과 끙끙거림을 눈치채고도 끝까지 모른척 하다가 그녀가 말을 꺼내야만 들어줬다.
내가 집을 나오면서 내 역할은 고스란히 둘째의 몫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넷째 동생을 낳고 자궁에 문제가 생겨 자궁을 아예 들어내야 했던 엄마가 아무렇지 않게 새로운 동생을 안겨주는 공포는 없겠지만 내가 어떻게 살아야했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둘째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상황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되는 공포에 조금씩 잠기고 있을 것이다.
그녀와의 통화 후에 대부분은 후회했고 약간은 후련했고, 또 아주 조금은 죄책감을 던 것 같았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 게 왜 남의 인생까지 훈수를 두려고 했던 건지, 그게 또 어떤 족쇄가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떠나버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으로 다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니 간 밤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연애사정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평균보다 조금 더 긴 연애이긴 했지만 내용상으로는 꽤 평범한 연애였고, 다소 일방적으로 끝나긴 했지만 또 그렇게 끝나는 연애가 그리 흔지 않은 일은 아니다.
감정의 놀음은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은 인생에 적합한 놀이다. 나는 괴로움을 느끼기 훨씬 쉬운 구조의 인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차라리 최대한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조금이나마 행복한 삶을 사는 방법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내가 이렇게 길고 질긴 연애놀음이라니.
그런 내가 사람의 감정을 다루는 소설가가 되려고 했다니.
괴롭지 않고는 못배길 시간들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풍성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엄칠 수 있을만큼의 여유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좋다', '싫다' 하는 것들을 양손에 쥐고 재고 따져볼만큼의 인생이 나에게 다가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너무 많은 것을 느끼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좋다, 싫다, 만족한다, 불만족한다, 충분하다, 모자르다, 거슬린다, 행복하다, 기쁘다, 슬프다, 충만하다, 벅차다, 자랑스럽다.
그런 감정들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꽤나 부유한 사람이란 것임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나는 갑자기 외롭고 차가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The Hierophant (교황): 주어진 책임감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가 없다. 마음은 자유롭지만 이성이 자꾸만 구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