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랑스 (마지막화)

Révérence

by 문혜정 maya

*소설 '발레리나' 속 모든 에피소드와 인물은 허구입니다.








처음엔 뭔가 했다.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채 기구에 올라타 가운데 달린 맷돌 손잡이 같은 걸 천천히 돌리면 기구에 올려진 두 다리가 점점 더 벌어진다. 올라탄 이는 괴로움에 낑낑거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손잡이를 조금씩 조금씩 더 돌린다.


"원장님이 테무에서 산 스트레칭 기구래요."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셀프 고문기계를 멈추지 않고 180도에 가깝게 다리를 찢고 있는 수강생을 발견한 예주가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자, 그 옆에 있던 다른 수강생이 작게 속삭였다.


"혼자 스트레칭하는 것보다 힘은 덜 들이고 더 많이 찢을 수 있대요."


고자질 하는 사람처럼 그녀가 급히 덧붙였다. 세상에. 예주는 신문물을 보며 놀랐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게 자의로 이루어진 고문이라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예주는 자기도 모르게 고문중인 그녀에게 물었다. 얼굴을 잔뜩 찌뿌린 발레 메이트는 가련한 표정으로 '죽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전공생들은 이걸 180도 넘게도 돌리고 있더라고요, 저번에 보니까."


고자질의 그녀가 자기만 알고 있는 걸 또 슥 내밀었다. 언제 그렇게 많은 걸 듣고 본걸까? 예주는 이 놀랍고도 생경한 광경에 눈을 못 뗀 채 엉거주춤 주저 앉아 가방에서 발레슈즈를 꺼내어 신고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수업 시작 전 10분, 혹시 모를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만 몸을 풀어준다. 늘 같은 것을 반복하는 발레 수업을 준비하는 것처럼 그녀의 스트레칭 루틴도 늘 같았다.

한쪽 다리는 접고 다른 다리는 쭉 편뒤 몸을 앞으로 접어 햄스트링을 늘려준다. 찌뿌둥한 느낌이 좀 사라지고 다리 뒤쪽의 기분 나쁜 당김이 줄어들면 앞으로 편 다리를 뒤로 돌려 쭉 뻗는다. 골반이 앞으로 엎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상체를 세우고 가능하다면 엉덩이와 허리 기립근에 힘이 빠지지 않은 선에서 등을 뒤로 젖혀 깜블레로 몇 초간 버틴다. 다리와 골반을 풀어준 뒤에는 목과 어깨를 천천히 돌려 중년이 된 후 흔하게 생기는 담을 예방한다. 발목과 발가락은 안쪽으로 당겼다가 천천히 펴며 데미포인부터 포인까지 쭉 뻗었다가 반대로 되돌리며 아킬레스 근처의 작은 근육들과 발바닥 근육을 깨운다.

그게 끝이다. 목표는 어제 늘어났던 만큼만, 조금 더 되면 좋지만 절대 무리는 하지 않는다. 어제보다 1cm정도 더 늘어난다면 그건 목표를 초과 달성한 것으로 친다. 1cm도 많다. 0.5cm로도 기쁘다. 왜냐면 인간의 몸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발전하는 속도 보다 노화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기 때문이다. 몸은 어제보다 늙었는데 기량은 기복 없이 늘기만을 바란다면 그게 욕심이다. 노화를 역행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없으므로 다다를 수 없는 욕심은 곧 화를 부른다. 예주는 그 욕심 때문에 부상을 입었던 기억들을 잊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부상의 회복이 정속의 노화와 만나면 기량의 유지는 커녕 퇴보가 더 가까운 나이가 됐으니까.

기구에 매달린 여자는 끄으으, 하는 비명과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때까지 손잡이를 돌린 후 구깃구깃하게 구겨진 표정으로 버텼다. 예주는 스트레칭을 하며 그 모습을 힐끔거리다가 자신의 내전근 파열 경험에 대해 들려줄까 말까 고민했다. 그렇게 억지로 늘리다보면 어느 순간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튿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극심한 통증이 찾아온다. 다음 날이 되면 허벅지 안쪽에 검붉은 멍이 짙고 넓게 퍼지고 원래 되던 가동범위의 반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회복은 더디고, 시간은 빠르게 지난다.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와, 많이 늘어나네. 나도 좀 해볼까?"


낑낑거리던 여자가 기구에서 내려오자 예주 옆에 있던 고자질쟁이가 낼름 기구 위로 올라갔다. 예주는 침과 함께 머금고 있던 조언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지금의 스트레칭 방법과 정도를 정할 수 있었던 건 그때 그 부상 때문이었다. 수많은 부상들이 지금 그녀가 추구하는 발레의 기준이 되어주었다.

최선을 다하되, 적당히. 최대한 노력하되, 되는 만큼만. 그때문일까? 그녀의 발레 실력은 초반과 비교하면 거의 늘지 않고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크고 작은 부상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치우고야 말겠다'는 욕망도 앗아가 버렸다. 대신 그런 생각을 한다. 언젠간 되겠지, 아니면 말고.

하다보면 욕심도 생기고 눌러왔던 욕망도 약간 꿈틀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녀는 햄스트링이 끊어질 때까지 춤을 춰 볼 수는 있겠으나, 햄스트링이 끊어져도 프리마돈나가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여전히 그걸 모르는 발레 메이트들은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상처받고, 좌절하고, 그리고 학원을 떠났다.

예주는 고개를 들어 유리벽 넘어 수업 막바지 동작에 열중한 기초반 수강생들을 바라봤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붉은 얼굴, 봉긋하게 부푼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들, 축축하게 젖은 옷. 1번발을 하고 열여섯번 뛰는 것만으로도 그녀들은 완전히 지쳐있다. 심지어는 포인도 한된 도끼발들을 하고서.

언젠가는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바닥에서 떨어지는 발가락은 언제나 포인을 해야한 다는 걸. 그것이 공중이라 할지라도. 그러니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과 어떻게든 해야하는 일이 늘 존재한다는 걸. 그 속에서 어떤 성취를 이루든, 어떤 좌절에 빠지든 그런 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국 모든 것은 흘러갈 뿐이다.

귀여운 그녀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은 한명도 없었다. 예주는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가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 같은데, 스스로도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드디어 돌아온 기분이었다. 한바탕 점프를 끝낸 수강생들이 헉헉대며 선생님을 따라 엉거주춤한 포즈로 거울을 향해 절을 했다. 레베랑스였다.


"앞 수업 끝났나 보다. 우리도 들어가자."


교실 바깥에 아무렇게나 앉아 스트레칭을 하던 수강생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지옥 같은 수업에 앞서 마음을 단단히 먹은듯 결연한 표정으로 서서 고개를 이리 저리로 꺾고, 발가락을 바닥에 대고 앞뒤로 눌러 풀어주느라 두두둑하는 뼛소리가 여기 저기서 났다.


"우리 무슨 조직 같다. 어디 쳐들어 가는."


누군가 뒤에서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의도치 않게 그 얘기를 들은 사람들이 풋,하고 웃음이 터뜨렸다.


"들어오세요!"


선생님이 교실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동시에 안에 있던 수강생들이 뜨거운 김을 한가득 머금고 와르르 쏟아져나왔다.

하나의 레베랑스가 끝나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각자의 한계와 고통 속에서 잃고 얻는 것들이 있겠지. 그리고 나면? 또 다시 미련없이 레베랑스를 하고 무대를 내려오는 거다.




오늘도 완전히 지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쓸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것처럼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을 정도였지만 반대로 그만큼 몸이 가볍게 느껴지기도 했다.

찰랑이를 돌보기 위해 휴가를 낸 남편 때문에 예주는 돌아가서 점심을 차릴 생각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다. 혼자라면 늦은 점심도, 식빵 한 조각 뿐인 식사도 상관 없었지만 하나가 더해진 식탁에서는 그게 어려웠다. 저녁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민스러웠는데 이제는 점심까지 더해지니 수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생각에 빠질 틈이 없었다. 그 바람에 현관문 앞 우편함에 꽂힌 우편물을 보지 못할 뻔 했다.

보통은 뻔한 광고물이나 반갑지 않은 고지서 같은 게 들어있기 마련인데 그날은 조금 더 크고, 도톰하고, 고급스러운 편지봉투가 하나가 더 꽂혀있었다. 뭐지, 하는 호기심에 거칠게 뽑아내어 그 자리에 서서 봉투를 뜯어봤다.


새로운 시작의 자리에 소중한 분들을 초대합니다. 양주아, 신현철 드림.


청첩장이었다. 주아의 청첩장. 신랑의 이름도 낯설지 않았다. 청첩장의 디자인은 바뀌었는데 그 안에 들어 있는 내용과 신랑, 신부의 이름은 지난번 그대로였다. 벙찐 예주가 다시 한번 청첩장을 읽어보는데 봉투 안에 들어있던 작은 쪽지 하나가 툭 떨어졌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좀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연락 먼저 못하고 청첩장부터 보내. 보면 네가 먼저 아는 척 해줘. 너무 놀리지마.


주아의 어른스러운 글씨로 쓴 쪽지에서 그녀가 느꼈던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그대로 느껴져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결국, 그렇게 됐군. 예주는 생각했다. 결국 누군가의 세계는 누군가의 것이고 모든 결정은 세계의 주인에게 달려있다. 수많은 세계가 그렇게 얼키고 설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부수고, 또 만든다. 그걸 뭐라고 할 수 있겠어. 결국 그렇게 됐네, 그뿐이지.

예주는 낮은 울타리의 대문을 끼익 밀고 들어갔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은 또 다른 세계다. 누구도 함부로 침입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점심으로는 반미를 만들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트에서 사온 쌀 바게뜨에 엄마가 준 불고기를 볶아 넣으면 전에 남편이 사온 맛집의 소고기 반미와 비슷한 맛이 날 것이다. 지난번 고기를 구워 먹을 때 남은 쌈무를 조금 다져 넣고, 늘 냉장고에 구미되어 있는 슬라이스 치즈 한장을 넣으면 더 비슷해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당 안으로 들어간 예주는 대문을 닫고 잠금쇠를 걸어 잠궜다. 여기까지 그녀를 함께 따라온 온갖 것들이 그 뒤에 후두둑 떨어져 문 밖에 남았다.

레베랑스. 다시 이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다른 세계는 이만 안녕. 예주는 막 뒤로 사라졌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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