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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Lee Aug 27. 2016

조카와의 여름(3)

암스테르담에서 조카와 작별하다

채환이가 떠나는 날 아침, 하늘은 흐리고 공기는 서늘했다.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여전히 서럽게 눈물꼬리를 떨궈내고 있었다. 우리는 던리어리에서 마지막 아침을 같이 먹었다. 녀석은 팬케이크에 베이컨을 얹은 요상한 아이리쉬 아침밥을 오래도록 기억하려는 듯 모처럼 맛있게 비워냈다. 팬케이크와 베이컨을 먹기 좋게 잘라주며, 나도 이 아침의 풍경과 느낌을 오래 기억하게 되리란 걸 알았다.
나도 암스테르담까지 채환이와 동행할 예정이었다. 네덜란드항공이 운항되는 구간만 UM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데, 더블린과 서울 사이는 직속 운항편이 없는 탓에 UM서비스가 적용되는 암스테르담 서울 구간의 비행기표를 끊고 암스테르담까지 내가 채환이를 데려다주기로 언니와 얘기가 되어 있었다. 채환이를 더블린이 아닌 취리히에서 만난 것도 취리히까지 네덜란드 항공편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존도 함께 가고 싶어했지만 떠나는 날이 수요일이라 휴가를 내기 어려웠고, 나는 바로 돌아오는 게 아까워 얼떨결에 혼자만의 짧은 암스테르담 여행을 결정했다.
일하러 가야 하는 존과 채환이가 먼저 작별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꼬옥, 오랫동안 안아주었다. 존의 품에서 채환이의 얼굴이 울먹여지는 것을 보며 주책맞게도 내가 먼저 눈물이 났다. 우리는 '내년에 또 보자'고 말했다.
"이모! 나 내년에 아일랜드에 또 올래! 내년엔 7월 11일에 와서 두 달 있어야지."
바라는 대로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어린아이의 맹목적인 믿음에 동참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인 나는 그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일단 그렇게 믿어버려야 헤어짐이 덜 슬플 것 같았다.

존이 떠난 후 나는 채환이와 공항버스를 타고 더블린공항으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날아 암스테르담에 닿았다. 우리가 암스테르담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쯤. 서울 가는 비행기 출발은 밤 9시35분이라 공항에서 단둘이 서너 시간을 죽여야 했다. 채환이의 지루함을 달래줄 일이 내심 걱정이었는데 채환이는 뜻밖에 신이 났다.
"와, 그럼 호텔 같이 가면 안돼? 나도 이모 따라 암스테르담 여행하고 싶다!" 빨리 서울 가는 비행기 타고 싶다고 칭얼댈 줄 알았는데 남아서 여행하고 싶다니, 녀석의 피에도 여행자의 유전자가 흐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채환아, 어쩌지? 이모가 지낼 곳은 호텔이 아니라 열여덟 명이 한 방에서 같이 자는 곳이야. 그런데다 시내까지 왔다갔다 하기엔 시간도 많이 들고 돈도 많이 들고. 미안해..."
내 말에 조카는 순순히 마음을 접었다. 착한 녀석. 나는 위로의 뜻으로 공항 안에 있는 카페에서 4유로가 넘는 바나나오렌지 스무디를 사주었다. 순식간에 유리컵을 비우더니 열번쯤 더 요란스럽게 빨대를 빨아댔다. 헤어지는 마당에 그냥 2유로 더 주고 큰 걸로 사 줄 걸 그랬나. "아, 맛있다!" 스무디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녀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탁자에 일기장을 꺼내놓더니 밀린 일기를 정성스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한자 한자 눌러 쓸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애의 작은 손가락들과 햇빛에 반짝거리는 뺨의 송송한 솜털들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순간 가슴이 아렸다.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 아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우리는 함께 공항 주변을 돌아다니며 암스테르담의 따뜻한 공기와 햇살을 즐겼다. 암스테르담에 왔었다는 인증샷으로 암스테르담의 시티로고인 'I AM STERDAM' 앞에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체크인을 하고, 네덜란드항공 직원이 채환이를 데리러 올 때까지 30분쯤 더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녀석을 보낼 시간이 왔다. 항공사 직원이 옆에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급해져 작별인사는 긴 말 없이 진한 포옹으로 대신했다. 우리 둘다 울먹이고 있었지만 다행히 내 눈물이 터지기 직전 녀석을 태운 에스컬레이터가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그래, 하고싶은 말들을 미리 편지에 써서 그애가 비행기에서 읽을 만화책 사이에 끼워두길 잘했다.


채환이를 보내고 늦은 저녁 암스테르담공항에 홀로 남았다. 해가 지기 전에 호스텔에 도착하려고 서둘러 시내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배낭 하나 달랑 맨 운동화 차림의 여자가 창문에 비쳤다. 오랜만의 배낭여행자 모드. 채환이는 잘 가고 있을까. 방금 헤어졌는데 벌써 그애가 보고싶었다.
녀석과 한달 동안 한집에서 부대낄 때는 종종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웠다. 내가 책임지고 돌봐야하는 열 살 짜리 아이와 종일 함께 지내는 것이 만만한 건 아니었으니까. 조카가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짜증이 났고, 짜증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평소 몇 배의 인내가 필요했다. 그런 환경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때문에 어깨가 종일 뻑뻑했더랬다. 그런데 이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거다. 홀가분하고 가벼웠다. 그런데 한편으론 가슴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중앙역으로, 다시 트램으로 갈아타고 시티센터를 통과해 인포메이션에서 알려준 정거장에서 내렸다. 지도를 보면서 예약한 호스텔을 찾아가는 길, 낯선 도시의 밤공기가 마음의 빈자리를 서늘하게 쓸어내렸다. 그순간 어디선가 "이모!" "이모!" 귀찮을 만큼 불러대던 녀석의 실로폰같은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채환아, 잘가. 아주 많이 사랑해. 이모의 여름을 잊지못할 추억들로 아름답게 채워줘서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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