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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Mar 27. 2021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나를 위한 치유 글쓰기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먼 곳에서 북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서둘러 여행을 떠나게 만든 유일한 진짜 이유처럼 생각된다.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치유 글쓰기를 하며 조금씩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안정을 찾아갔다. 서툰 글솜씨로 공동 저서도 출간하게 되었고 내가 쓴 글이 책이라는 실물로 서점에 진열된 것을 보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글을 쓰기 위해 그렇게 힘든 시간을 겪었나 하는 어이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뿌듯했던 출간의 기쁨을 마주한 뒤 내면에서는 또 다른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공저가 아닌 개인 저서를 써 보고 싶었다. 내 이름 석자가 찍힌 책이 서점 진열대에 놓여 있는 것을 상상하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 이름으로 된 책을 꼭 내야지!'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개인 저서를 출간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개인 저서를 출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설수록 글이 써지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과 책을 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공저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책을 내기 위해서는 책을 위한 글을 써야 하는데 이 부분이 어려웠다. 겨우 한 꼭지를 쓰고 다시 읽어보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연 내가 쓴 글이 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독자가 책을 구입하는 이유는 책에서 정보 또는 위안이나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을 때다. 이 점은 독자로서 나 또한 마찬가지다. 독자 입장에서 내 글이 돈을 지불할 만큼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니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한 동안 글쓰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브런치를 통해서 만난 작가님들과 글쓰기 모임을 하게 되었다. 모임을 주최한 스테르담 작가님이 오리엔테이션 때 나를 포함한 모든 작가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작가님은 왜 글을 쓰세요?"


질문을 들은 순간 뾰족한 바늘에 손 끝을 찔린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거지?'


대답 대신 똑같은 질문이 내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렸다.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었더라?'


죽고 싶었던 어느 밤, 지금 당장 죽는다면 무엇이 가장 후회될 것 같냐고 내게 물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어 놓지 않으면 눈감는 순간에 가장 후회할 것 같다는 대답을 들었고,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였다. 덕분에 우울증도 나았고, 번아웃에서 회복할 수 있었다. 


몸과 마음이 회복되고 우울증과 무기력에서 벗어날 만큼 힘이 생기자 또 다른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욕망은 욕심이 되고 어떻게 써야 팔리는 글이 될지 고민하며 애태웠다. 초심은 지켜내기 어렵고, 초심이 사라진 자리에는 욕망이 자리를 차지한다. 


번아웃을 겪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내가 가진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치유 글쓰기를 하며 그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어느새 번아웃 이전 상태로 돌아가 내가 쳐 놓은 덫에 또다시 걸려든 것이다.


번아웃에서 회복된 지 겨우 일 년 남짓인데 이렇게 쉽게 과거로 되돌아가게 될지 상상도 못 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라고 누가 그랬던가. 


결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래된 습관이 몸과 마음에 배어 있다면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한다. 


모임을 마치고 노트를 펼쳤다. 아까 받았던 질문을 적었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고요히 대답을 기다렸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첫 번째 대답이 들렸다. 


'그래, 맞다!'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마음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있는 엉킨 생각을 풀어내고 싶었다. 먼지 쌓이고 부서진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고 고치고 싶어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어서, 소설가의 꿈을 이루고 싶어서, 나의 글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음에서 울린 대답을 노트에 하나씩 적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에서 모든 것의 본질에는 '왜 why'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책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쳤다. 사이먼 사이넥은 '왜'는 신념이라고 했다. 말하는 모든 것, 행동하는 모든 것은 그 주체의 신념을 드러 낸다고 했다. '어떻게'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고, '무엇을'은 그 행동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밑줄 치며 읽었던 이 내용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와 '무엇을'에만 집착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때의 나는 행복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았다. 스트레스로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며, 힘겹게 하루를 벼텨야했다.


 '왜'에 대한 대답을 찾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마터면 나의 어리석은 잔꾀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하루키는 먼 곳에서 들려온 북소리를 듣고 긴 여행을 떠날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누군가 하루키에게 왜 여행을 떠나냐고 물었다면 그는 분명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먼 곳에서 북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여행을 떠나야 해."


하루키의 대답을 들은 이는 아마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긴 여행을 떠날 전부이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왜'라는 질문은 자신에게 던지고 자신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답을 찾으면 그것을 단단히 붙들고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그러면 '어떻게'와 '무엇을'이 저절로 따라온다. 하지만 '왜'가 없이 나머지 두 가지가 선두에 오면 줄이 끊어진 연처럼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바람이 부는 데로 휘청이다 땅바닥으로 고꾸라 질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나의 글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쓴다. 죽는 순간 후회하지 않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이야기를 글로 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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