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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Mar 17. 2021

상처를 활자로 드러낼 때

나를 위한 치유 글쓰기

내면 아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상담학 사전에 따르면 '내면 아이는 한 개인의 정신 속에서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존재하는 아이'를 뜻한다.  


가족 치료사이며 내면 아이 전문가인 존 브래드쇼(John Bradshaw)는 '상처받은 감정이 억압된 채 자라면  그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그 성인의 내면에 남아 있게 된다. 무시당하고 상처받은 과거의 내면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관계나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운 원인이 된다.'라고 말했다.




생명이 만들어진 순간 감정도 함께 만들어진다. 생후 몇 개월 되지 않은 아기도 표정과 몸짓으로 자신의 감정과 의사 표현을 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감정은 생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을 때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제지당하거나 꾸지람을 듣게 되는 경험을 한다. 이런 경험은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수치심 또는 피해 의식을 남긴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아이의 성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원인이 된다. 


어린 시절에 경험한 일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과거 어떤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게 되면 그 충격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은 채 큰 상처로 남는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며 무의식에 저장된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 안에는 수많은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존재한다. 상처 받은 아이의 시간은 더 흐르지 않는다. 세상은 변하고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었지만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진 내면 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다. 


세 살, 아홉 살, 열세 살의 내면 아이들이 내 안에서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것이다. 내면 아이들은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다.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무언가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불안함을 느끼게 되면 곧바로 방어태세를 취하고 상대를 공격한다. 이것은 내면 아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이지만, 성인이 된 자신과 내면 아이의 간극을 느끼고 또 다른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나에게도 여러 명의 내면 아이가 있었다. 

어린 시절 꿈속에서 엄마에게 버림받아 상처 입은 나, 아빠의 싸늘한 시선에 두려웠던 나, 실수한 걸 들키기 싫어 선생님께 거짓말했던 나, 동네 아저씨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수치스러웠던 나, 남동생과의 차별에 서러웠던 나, 칭찬받지 못했던 나, 친구에게 미움받았던 나 등등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했던 나의 내면 아이와 두려움과 수치심에 괴로웠던 나의 내면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내 안에 존재했다. 나의 내면 아이들은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어른으로서 무언가를 책임지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미숙하고 어리석게 행동했다. 그로 인해 나는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내면 아이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바쁘게 살았다. 하지만 번아웃을 겪으면서 단순히 지난 1, 2년 무리하게 일을 해서 나의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무언가 잘 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치 단추가 아주 많은 셔츠를 입었는데 처음부터 어긋난 곳에 단추를 채워 나의 몸을 꼼짝달싹할 수 없게 옭아맨 것 같았다. 단추를 모두 풀고 처음부터 제대로 채워주고 싶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상처 입은 나에게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그 당시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도 내 곁에 없다.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나의 상처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처를 안은 채 그대로 살아가야 할까? 


나는 내 마음에 물어보았다. 계속해서 상처를 외면하며 살고 싶은지, 아니면 방법을 찾아내어 치유하고 싶은지. 과거의 상처를 마음에 담은 채 살아가는 것은 나를 무겁게 한다.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기를 원했다. 가볍고 자유로워진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나를 치유해주기로 했다.


노트를 펼쳐놓고 나의 내면 아이를 한 명씩 데려왔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써 내려가며 내면 아이와 마주했다. 잔뜩 웅크린 채 두려워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미안했다. 


'좀 더 빨리 살펴봐줄걸, 좀 더 일찍 들여다봐줄 걸.'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한 명의 내면 아이가 충분히 치유되고 회복될 때까지 상처를 어루만져주었다. 과거로 돌아가 그때 내가 받길 원했던 위로와 사과를 내가 나의 내면 아이에게 해 주었다. 그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관심이었고 애정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믿고 있는 죄책감에 대한 용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 그리고 용서해 주었다. 상처에서 치유된 아이는 내게 활짝 웃어주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몸이 되어 내게서 떠나갔다. 


마음 치유 전문가 박상미 교수의 《마음아, 넌 누구니》에는 70세 미자 씨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자 씨는 화병과 우울증으로 인해 자식들의 권유로 상담을 받게 되었다. 박 교수는 상담을 진행하면서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와 어머니에게 보호받지 못한 서운함으로 인해 미자 씨가 오랜 시간 분노와 원망을 안고 살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박 교수는 미자 씨에게 말로 하기 힘든 감정들, 아픈 기억들을 노트에 적어오게 했는데, 노트 한 권을 써 왔다고 한다. 미자 씨는 상담이 끝날 무렵 속이 후련해졌다며 노트를 한 장 한 장 찢어버리고 묵은 감정들과 작별을 했다. 상담을 받고 나서도 자신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으면 목을 매 죽으려고 했다는 미자 씨는 일흔이 될 때까지 치유받지 못한 자신의 내면 아이와 평생을 함께 살아왔다. 


일흔의 노인에게도 어린 시절의 상처는 죽음과 맞바꿀 만큼 아프게 느껴졌던 것이다. 목을 매겠다고 가지고 다니던 끈도 다 잘라버린 미자 씨는 이렇게 행복한 게 인생인데 일흔 살에 끝내버렸으면 저승 가서 땅을 치며 후회할 뻔했다고 박 교수에게 가끔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기억 속에 담아 둔 상처는 내면에 켜켜이 쌓여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 고인 물은 섞고, 섞은 물에서는 악취가 난다. 치유되지 않은 내면의 부정적 감정은 무의식에 고이고 섞어 표정과 태도로 악취를 드러낸다. 


치유 글쓰기는 오래된 상처를 자신에게 드러내 보이고 그것을 흘러가게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있다. 객관화된 상처는 자신을 해치는 힘을 가질 수 없다. 내면에 담아 두었던 묶은 상처를 활자로 드러낼 때 부정적인 에너지는 내면에서 흩어진다. 흩어진 에너지는 형체가 없기에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어떻게 보면 내면 아이는 핑계와 변명을 위해 스스로 가두어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그 아이들에게 자유를 주자. 오랜 세월 자신 안에 가둬두었던 그 아이들이 마음껏 웃고 떠들고 뛰어놀 수 있도록 자유를 선물하자. 그 아이들이 자유로워지면 나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상처를 활자로 드러낼 때 활자는 치유의 힘을 가진다. 치유된 상처는 깃털처럼 가벼워져 멀리 날아간다. 70세의 미자 씨가 치유 글쓰기를 통해 삶의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신도 상처를 활자로 드러내어 행복한 세상을 마음껏 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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