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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Apr 21. 2021

우리 딸은 왜 셈을 못할까?

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 듣게 된 남의 얘기 1

월요일 늦은 오전, 커피를 내리기 위해 커피 필터를 찾았다. 

'아, 맞다. 어제 다 썼지?'

싱크대 문을 여는 순간 기억이 났다. 어제 외출했을 때 커피 필터를 사 와야지 생각해 놓고 깜빡한 것까지 떠올랐다. 필터를 사 와서 커피를 내려 마시느니 동네 카페에 가서 한 잔 마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책 한 권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요즘은 집에서 일을 해서 카페도 웬만해서는 가지 않는 편인데 커피 필터 때문에 카페행을 하게 되었다. 약속이 있을 때는 카페를 찾지만 일을 하거나 글을 써야 할 때는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 조용히 집중하고 싶어서 카페를 찾았다가 조금 큰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카페는 오픈된 공간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내가 집중하고 싶다고 그분들에게 목소리를 낮춰서 얘기해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집에서 일하거나 그게 답답할 때는 스터디 카페를 찾게 되었다. 그게 나도 마음이 편했다. 


그래도 가끔은 카페를 찾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마음을 가볍게 하고 간다. 예를 들면, 오늘이 그런 날이다. 내게는 오직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를 찾는 날이니까. 따뜻한 봄햇살을 맞으며 집에 들어오는 길에 필터를 꼭 사야지라고 다짐하며 동네 자주 가는 카페로 향했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넓은 홀의 카페에는 세 팀 정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자서 노트북을 마주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 두 명과 친구 혹은 동네 이웃으로 보이는 네 명의 주부가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었다. 주문을 하기도 전인데 카페 안은 네 사람의 목소리로 이미 가득했다.


마음을 비우고 오길 잘했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스콘을 주문하고 자리를 잡았다. 얘기를 나누고 있는 분들과 일부러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네 사람의 목소리는 내 옆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이것은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듣게 된 이야기의 기록이다. 



"정말 속상해. 우리 딸은 셈을 왜 그렇게 못할까? 내가 그걸 붙잡고 봐 줄 수가 없는데 왜 그렇게 이해를 못하는지 몰라."

"우리 아들도 그걸 그렇게 이해 못하더라.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그제야 지가 혼자서 풀더라고."

"우리 남편은 왜 그런다니? 요즘 맨날 늦고 주말에는 꼼짝을 안 해."

"우리 친정 엄마는 며칠 전에 전화 와서 얼마나 잔소리를 하는지 몰라."


한 사람이 얘기를 하면 다른 세 사람이 맞장구를 쳐주고, 네 사람이 동시에 얘기하기도 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속상한 일을 함께 나누는 그들의 이야기가 배경 음악처럼 자연스럽게 내 귀에 들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네 사람의 대화에 그들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체는 모두 자녀와 남편, 시댁, 친정 또는 그 외 타인에 대한 것이다. 내 또래이거나 나보다 조금 어릴 수도 있는 주부인 그녀들의 중심에는 가족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와 주체도 자신이 아닌 아이와 남편이 되었을 거다.  


순간 서글퍼졌다. 그들에게도 분명 '나'가 있을 텐데 아내와 엄마의 역할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맡은 역할 뒤로 밀쳐두었을 것이다. 남편은 출근을 하고,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에 보낸 후 얻게 된 자신의 시간에서도 그들은 오롯이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이 카페를 떠날 때까지 나눈 대화의 주제가 우리 딸, 우리 아들, 우리 남편으로 이어진 것이 나는 왜 슬펐을까?


그건 내가 너무 이기적인 인간이라 그런 것 같다. 자신의 자리를 아내와 엄마로서의 역할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는 그들의 희생이 그 날 따라 아프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인 그녀들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나는 요즘 빨간색에 푹 빠졌잖아."

"나는 요즘 꽃이 그렇게 예쁘더라."

"나는 요즘 사진 찍는 게 너무 재미있어."


한 참 뒤에 아이들이 올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며 네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문을 나서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다음에 마주칠 때는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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