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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Apr 19. 2021

열정과 무기력 사이

허무, 허탈, 허전함을 받아들이며

초등학교 운동회나 중고등학교 때 치렀던 체력장의 여러 종목 중에서 가장 긴장을 하게 만들었던 것은 달리기였다. 


100m 달리기, 계주 또는 오래 달리기든 얼마나 달려야 하는가는 뒤에 문제다. 출발선에서 달릴 준비를 하고 '땅'하는 출발 신호를 들으면 몸은 반사적으로 뛰쳐나간다. 잘 뛰든 못 뛰든 모두 결승선을 향해 열심히 뛴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마침내 결승선에 도착한다.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얼굴을 빨갛게 열이 올라있다.


결승선에 도착하면 해냈다는 기쁨에 뿌듯해야 하는데 돌이켜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다. 결승선에 도착하기 위해 두 주먹 불끈 쥐고 입을 앙다문 채 앞만 보고 달리며 느꼈던 쾌감이 결승선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런 걸까? 

목표를 향해 달렸고 결승선에 도착했다면 달리는 과정보다 도착 후에 더 벅차고 기쁘고 가슴 뛰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3주간 나는 사업계획서를 작성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투자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부기관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하는 일이었다. 3월부터 자료를 준비했다. 유튜브, 블로그, 뉴스 기사 등을 통해 정보를 입수했다. 주변분들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학창 시절에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를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했다. 


매일 고민하고 쓰고 다듬고 자료를 찾아 헤매었다. 이것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을지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래 봐야 명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며 해결책을 찾아 써 내려갔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이 지나 기한 내에 작성을 완료했고 드디어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결과는 내 몫이 아니기에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오늘 하루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열심히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 그러면 뿌듯하고 홀가분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마음 한편이 허무하고, 허탈하고, 허전했다. 


최선을 다했고 기한을 맞추었으니 당연히 기쁠 줄 알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막막했던 시간이 지나갔는데 왜 뛸 듯이 기쁘지 않은 걸까? 




열정을 한 곳에 다 쏟아부은 후 그것을 떠나보내면 그 자리는 비게 된다. 허무, 허탈, 허전에 들어가는 '허虛'자는 '빌 허'이다. 열정으로 메꾸고 있던 그곳이 비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붕 뜬 것 같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이런 마음이 들 때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이 풀리면 몸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몇 날 며칠 몸살처럼 아팠다.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으니 몸도 가눌 수 없었다. 열정이 떠난 자리를 무엇으로 메꾸어야 할지 난감했다. 난감해하는 틈을 보이면 무기력이 슬그머니 자리를 차지한다.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이제 더는 모르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제발 건들지 마.'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내가 무기력한 인간으로 한 순간에 돌변한다. 그럴 때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다. 그리고는 그대로 방치해버렸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서서히 돌아오게 되지만 무기력에서 회복되는 시간은 꽤나 길었다. 


이번에 찾아온 허무, 허탈, 허전함을 하나씩 느껴보았다.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 과정을 예전에는 왜 그렇게 불편하게 느꼈던 것일까? 


그 안에는 죄책감과 죄의식이 숨어 있었던 것 같다.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잠시의 여백을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달려야만 한다고 그래야 열정이 있는 거라고 믿었다. 


어떻게 사람이 365일 100m 달리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길든 짧든 달리기는 출반선이 있고 과정이 있고 결승선이 있다. 결승선에 도착하면 숨도 고르고 최선을 다해 뛰어온 자신을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 주기도 해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출반선에 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내 안의 빈 공간을 만끽했다. 예전과 달리 이 느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나는 분명 회복될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밑바닥에서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무기력한 이 상태가 두렵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또한 애써 외면하거나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 때문에 생겼고, 어디로 흘러간다는 걸 정확하게 인지할 뿐이다.   




불편하고 불안한 감정들은 나쁜 것이 아니다.

마음의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할 때는 두려움으로 인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 그것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다. 그저 조금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면 된다. 내면 저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안다. 그것을 알기에 지금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열정을  쏟을 또 다른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면 회복이 되었다는 증거다. 그리고 알아차린다. 곧 새로운 출발선에 두 주먹 불끈 쥐고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당당히 서 있을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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