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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Oct 17. 2020

나의 두 번째 사춘기

질풍노도를 제대로 즐겨보리라!!!


사춘기의 정의
:신체가 성장함에 따라 성적 기능이 활발해지고 2차 성징이 나타나며 생식기능이 완성되기 시작하는 시기.

관련 용어
: 질풍노도의 시기, 신체적 변화, 정서적 변화, 인지적 변화, 청소년, 재현 이론, 정체감 대 역할 혼란, 상호적 조망 수용 단계, 초경, 내분비선 체계, 형식적 조작기, 자아 중심성, 상상의 청중, 개인적 우화 

이 시기에 남자는 남성적으로 여자는 여성적으로 뚜렷이 변화가 나타난다. 그리고 육체적인 변화만큼이나 심리적, 감정적인 부분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다. 흔히 우리는 이 시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는데, 질풍노도란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라는 뜻으로 청소년기의 격동적인 감정 생활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된다. 즉, 청소년은 어른도 어린이도 아닌 주변인이므로, 여러 면에서 좌절과 불만이 잠재하여 극단적인 사고와 과격한 감정을 곧잘 가지며, 정서적인 동요가 심하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질풍노도의 시기 (Basic 중학생이 알아야 할 사회· 과학 상식, 2007. 2. 20., 이안태)


질풍노도의 사전적 의미를 읊지는 못해도 사춘기를 겪어본 이들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 것 같고, 또 때로는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안드로메다 저 어디쯤 내 몸과 마음이 붕붕 떠다니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그런 혼돈의 상태인 시간들, 나의 10대도 그랬다.


10대 소녀들은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 웃는다던데 어찌 된 게 나의 10대는 너무 심각하고 외롭고 쓸쓸했다. 죽을 건데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어제까지 친했던 친구가 오늘은 쪽지를 보내 거리를 두자고 선언을 하는 이해하기 힘든 인간관계에 '도대체 산다는 건 뭐지?'하고 꽤나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가장 심각했을 때는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고 싶다는 나의 꿈을 부모님의 반대로 접었을 때였다. 나는 삶의 모든 의미와 목표를 잃어버렸고 공부를 놓아버렸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앞두고 책을 코에 박고 공부하는 친구들을 이해 못해 혼자 창밖의 노을만 멍하니 바라보며 나의 학창 시절을 보내버렸다. 


그렇게 공부를 놓아버렸으니 수능은 당연히 망쳤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디 취직을 할 수 있겠냐며 부모님은 재수를 허락했다. 하지만 재수 시절에도 60~70명의 남녀 재수, 삼수생이 모여 수업을 하다 보니 이성에 눈뜨고 공부보다는 연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이어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이제 제발 정신을 차리라며 하늘은 내게 반전 있는 한 방을 선물한다. 


그해 여름 아빠의 건강에 갑작스러운 이상 신호가 왔고, 대학병원에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패닉 상태가 되었다.


편찮으신 아빠를 두고 더 이상 비싼 돈을 들여 재수 학원을 다니며 연애질을 하고 있을 수 없었다. 마침 그때 남자 친구도 학원을 옮겼고 서로 쿨하게 작별을 했다. 아빠가 걱정되었고 우리 가족 모두 뭔가 모를 불안함을 가지고 있어서 공부에만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중환자실에 계시는 아빠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능까지 공부하는 척이라도 하며 눈물을 삼켰다.


수능을 치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1년간 재수하며 흘려버린 돈과 시간에 대해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갚고 싶었다. 반강제적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어렵게 마무리하려는 나의 몸부림이 있었지만 수능 후 한 달이 채 못 되어 아빠는 투병 4개월 만에 눈을 감으셨다. 


처음 겪어본 죽음이었다. 

그것도 나의 부모님 중 한 분의 죽음이라 충격은 더 컸다. 


장례식장에서 보낸 3일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여전히 꿈만 같다, 


그 뒤로 많은 것이 모든 것이 변했다.


가장의 부재는 생각보다 컸다. 

경제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의지할 곳을 상실해 버린 것 같았다. 아빠는 전형적인 경상도 무뚝뚝한 가장이어서 자식들에게 살갑게 사랑을 표현하지는 못했어도 여름휴가철이면 자식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놀러 가고 월급날이면 양손 가득 간식거리를 사 오는 츤데레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고, 나의 10대도 강제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급작스럽게 맞이한 20대는 대학생활과 아르바이트, 취업 준비, 직장생활, 이직, 연애, 결혼에 대한 고민으로 정신이 없었다. 10대 때만큼 불안하지는 않았지만 내 눈 앞에 닥친 먹고사는 문제로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20대를 치열했다. 살아남기 위해지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래서 30대를 맞이했을 때는 기뻤다. 

미국으로 생활 터전을 옮겼고 그렇게 원하던 더 큰 세상에 나를 데려다 놓은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이민 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언어, 사람들, 환경, 문화 모든 것이 신기했고 흥미로웠다.  


불안했던 10대 치열했던 20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의 안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디서 오는 자신감인지 모를 정도로 내가 선택한 길이 맞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30대 중반까지 앞만 보고 달렸다. 그때는 그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나를 흔드는 시련이 서서히 밀려왔다. 

나의 모든 것이라고 믿었던 나의 일과 삶에 나는 점점 만족하지 못했고, 어느 순간부터 불평불만만 잔뜩 늘어놓고 있었다. 덩달아 업무 과중으로 체력도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의 그런 모습이 나에게 무척이나 낯설었다. 늘 열정이 넘쳤고, 책임감으로 내 사명을 다 해 왔는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느껴졌고 그 현실에서 그저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나의 두 번째 사춘기가 시작된 것이.




40대에 겪는 질풍노도는 10대의 그것과는 다른 듯 닮아 있었다. 

 

'강한 바람'과 '성난 파도'의 감정이 부리는 요동은 닮아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중년으로 그리고 노년으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나는 철저하게 주변인인 된 것 같았다.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이 비로소 현실로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중년이 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신체적인 성장이야 이미 멈추었고, 오히려 노화가 진행되는 시기이지만 심적인 부분에서는 10대에 겪었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다시 한번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10대였을 때 어른들은 고민도 없고 나와 같은 방황과 혼돈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어른이 되어보니 삶의 방황과 혼돈, 그리고 고민은 언제나 삶과 세트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 그건 세트라기보다 삶이라는 여행 안에 필수 패키지인 것 같다.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 구성품 인 패키지여행인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그나마 쉬운 법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첫 번째 사춘기를 되짚어 보았다. 아빠의 죽음으로 갑자기 허무하게 끝나버린 나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이번에는 제대로 겪어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솔직히 그때는 더 반항하고 싶어도 겁이 많이 났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소심하게 반항을 했다. 티 나지 않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차리리 적극적으로 있는 힘껏 반항을 했었다면 후회는 남지 않았을 텐데 나의 소심한 반항에 대한 미련을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한 짓이며 시간 낭비란 말인가!!!'


그래서 나의 두 번째 사춘기는 제대로 반항해 보기로 했다. 




학창 시절 튀면 안 된다고 해서 조용히 살았다. 그런데 이제 튀어 보려고 각종 SNS를 한다. 너도나도 튀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 크게 티가 나지 않아 억울하지만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튀어보려 애쓰는 중이다. 


부모님께 대들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내 꿈이 엄마 아빠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는 도전해 보지 못한 억울함과 울분으로 여전히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이 마흔에 엄마한테 심하게 대들었다. 결과는 부끄러움과 함께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내게 쌓여있던 그때 반항하지 못했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달라고 떼쓰지 못했던 가슴속 앙금이 사라지게 되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폐 끼치면 안 된다고 배웠다. 성공하려면 적당히 해서는 안되고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악착같이 결과를 내고 마무리를 해야 한다고 믿었던 내 마음을 내려놓았다. 적당히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일이 더 잘 풀리는 거다.  


아씨!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반항을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뒤늦게 이게 무슨 짓이람!


10대 때는 반항하고 싶어도 겁이 나서 행동하지 못했던 것들을 나이 40이 되어 제대로 반항해보니 세상 마음 편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결심했다.

나의 두 번째 사춘기는 제대로 반항하며 즐겨보리라고!!


나는 지금 질풍노도라는 파도를 서핑하며 제대로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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