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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마야 Mar 01. 2021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은게 아니라 사는게 힘든 거였다

엄마의 나이를 따라가며

살다 보면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 어떤 장면이 있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지워지지 않고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툭하고 떠오른다. 그럴 때면 과거에 겪었던 상황과 감정이 그대로 느껴져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며칠 전 퇴근길 지하철에서 브런치 앱을 열어 글을 쓰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다. 오래전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눈물부터 흘러내렸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에서 급하게 눈물을 훔치고 쓰던 글을 급하게 저장하고 앱을 닫았다.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나의 눈물샘을 터트린 기억 속 그 장면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부모님은 경상도 분이다. 경상도 분 중에서도 다정하고 살가운 표현을 하는 분들도 분명 계실 테지만 나의 부모님은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을 가지고 계셨다. 애정표현을 잘하지 않으셨던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나는 마음 한편에 부모님이 나를 많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모로서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노력을 절대로 게을리하시지 않으셨던 두 분이셨건만 어리고 철이 없었던 나는 그렇게 믿었다. 


아빠는 트럭 운전을 하셨고 엄마는 전업 주부였다. 엄마는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거리를 놓치지 않으며 반찬 값이라도 보태려고 늘 아등바등하셨다. 그렇게 부지런하고 근검절약하신 두 분 덕분에 우리 네 남매는 아주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모자람 없이 자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스무 살이던 해에 갑자기 아빠가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병을 발견하고 수술을 하고 손을 써보았지만 합병증으로 인해 발병 3개월 만에 가장을 잃는 슬픔을 우리 가족은 겪게 되었다. 표현이 서툰 우리 가족은 서로의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 보듬어 주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그 시간을 버티며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평생 살림만 살며 집에서 소소한 부업으로 반찬 값을 보태던 엄마는 갑자기 가장이 되었다. 막내인 남동생은 중2였고, 나도 대학 진학을 해야 했기에 돈 들어갈 일이 태산인 상태였다. 결혼 후 한 번도 직장 생활을 해 보지 않은 엄마는 주변 분의 소개로 그릇 공장 생산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우리 아침을 챙겨 주시고 엄마는 군청색 작업복을 입고 출근을 하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의 작업복 입은 모습이 내게는 참 낯설었다. 


어느 날 친구들을 만나러 늦은 오후에 외출을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군청색 작업복을 입고 지친 얼굴로 걸어오는 엄마를 보았다. 그 날 따라 작업복을 입은 엄마는 더없이 초라해 보였고 지쳐 보였다. 얼굴은 생기도 없고 웃음기도 전혀 없었다. 피곤함과 슬픔과 짜증이 뒤섞인 여러 가지 얼굴을 보는 순간 엄마를 만났다는 반가움보다 '엄마는 왜 저런 표정일까?'라는 불만이 먼저 느껴졌다. 


"엄마!"하고 내가 먼저 엄마를 불렀지만 나를 알아본 엄마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어디가노?"라고 약간의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나에게 묻고는 엄마는 나를 지나쳐 그대로 집을 향해 걸어가셨다.  


딸을 만났는데 반가운 표현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엄마에게 섭섭함 마음이 들었다. 지쳐 있던 엄마의 얼굴도 마음이 아팠지만 나를 반겨주지 않았던 엄마에게 더 서운한 마음을 간직한 채 나는 버스 정류장을 향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미국으로 이주할 기회를 얻었고 기쁜 마음으로 한국을 떠났다. 자식이 네 명이나 있으니 나 하나 엄마 곁에 살지 않는다고 엄마가 서운해하거나 나를 그리워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들의 간섭과 잔소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에 즐거워했다. 


비자 문제와 영주권 등의 문제로 한국에 들어오는 게 쉽지 않았고, 5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휴가를 얻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한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가족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온 식구가 공항에 마중을 나온다고 했고, 나 역시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을 볼 생각에 설렘과 반가움을 안고 입국장을 빠져나왔다. 


엄마와 언니, 조카가 서 있었다. 한국을 떠날 때보다 조금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엄마를 보고 제일 먼저 안아드렸다. 그때 엄마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니는 엄마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더나?"라고 말씀하셨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미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나는 한국에 자주 연락하지 못했다. 시차도 있었고 내 앞가림하느라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다. 한국 명절일 때만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어본 게 다였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도 했지만 내가 자주 연락을 안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아니더라도 언니와 동생이 엄마를 잘 챙겨 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는 나한테 크게 애정이 없으니 나의 안부도 그리 개념치 않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입국장에서 5년 만에 만난 엄마는 나를 보고 반가움과 서운함에 울먹이며 나에게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말이 내게는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 당시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그 뒤로 내가 너무 이기적인 딸이라는 걸 가끔 되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다시 5년의 세월이 지나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엄마 집에 얹혀살면서 엄마와 많이 부딪히고 짜증도 내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면서 마지막 자존심을 엄마에게 굽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세월이 지나도 나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자존심 강한 엄마의 셋째 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엄마와 이렇게 부딪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리를 해서 서울로 자리를 옮겼다. 엄마도 나도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애틋하지만 그 애틋함이 서로의 기대를 채워주지 못할 때는 부정적으로 표현이 된다는 게 안타까웠다. 서울로 독립을 하고 나서는 나도 엄마를 다르게 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엄마가 얘기하는 걸 잘 들어주고 맞장구를 쳐주고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 이야기도 차분하게 엄마한테 전해주고 사소한 일상도 엄마와 통화할 때 들려주었다. 그랬더니 엄마와 나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전화하는 법이 잘 없던 엄마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내게 전화를 한다. 아침에는 뭐 했고 점심에는 뭐 했는지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들려주신다. 통화를 마무리할 때는 나의 끼니를 항상 챙기신다. 그러면 나는 혼자인 엄마의 끼니를 챙긴다. 


코로나로 인해 지난 추석에는 집에 내려가지 않았다. 한국에 있어도 엄마 얼굴 보는 게 힘든 일이 된 게 많이 안타까웠다. 이번 설에도 그냥 혼자 서울에서 보낼까 하다가 엄마가 해 준 밥이 너무 먹고 싶어 8개월 만에 집에 내려갔다. 


 3박 4일의 짧은 연휴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를 타러 엄마와 함께 터미널로 향했다.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 나는 엄마를 마주 보고 있었다. 


엄마를 길에서 마주 할 때면 20년 전 군청색 작업복을 입고 지친 얼굴로 걸어오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엄마는 내가 보고 느꼈던 엄마의 어두운 표정보다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 철없는 딸은 그걸 알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지금 내 나이에 엄마는 네 자녀의 가장이 된 것이다. 나는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힘들다며 남편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사는데 말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그때로 돌아간다면 작업복을 입고 터벅터벅 지친 발걸음으로 걸어오는 엄마를 안아드리고 싶다. 자식들 앞에서 약해지지 않으려고 눈물을 참는 엄마에게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말해드리고 싶다. 


안타깝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길에서 엄마를 마주할 때면 엄마를 안아드리기로 했다. 20년 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랬다는 것을.  엄마의 나이를 따라가다 보니 사는 게 정말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오랜 시간 자존심 세고 제 멋대로인 우리 네 남매의 엄마로 버텨준 그 세월의 무게에 감사함과 존경을 보내드린다.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셋째 딸이지만 엄마와 헤어질 때면 엄마를 안아드리며 지난 20년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미안함을 사랑으로 갚아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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