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언론인, 우리의 '갑'들에게
지난 7월 17일, 상암 MBC 앞에서는 보도국에서 근무하는 '방송지원직'이라 불리는 방송작가들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사실 프리랜서, 특수고용직이 일반적인 방송작가 가운데 MBC 보도국의 '방송지원직' 방송작가는 좀 특별하다. 어쨌든 그들은 노동법상 노동자니까.
MBC 보도국은 2019년과 2020년, 두 차례 방송작가 부당해고 이슈가 발생했다.
2019년에 해고된 방송작가는 50여 일간 1인 시위까지 하며 투쟁해 결국 시사 교양국으로 자리를 옮겨 남은 계약기간을 채웠다. 그리고 2020년에 발생한 부당해고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등을 통해 노동자로 인정받아(이 말 자체가 웃기지만, 한국 법이 그렇다) 복귀해 근로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만하면 MBC도 이제 사람 귀한 줄 알고 법도 좀 지키면서 살 줄 알았다.
그러나 회사는 '방송지원직' 직군을 신설해 복직한 방송작가를 정규직과 구분했으며 '직원'이 아니므로 언론노조 MBC 본부에 가입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인사평가 역시 이들 5명에게만 별도로 '상급자에 의한 일방향적 인사평가'를 실시하는 등 차별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MBC 보도국 작가들은 이러한 차별적인 인사평가 등과 관련해 다시금 노동부에 근로감독 청원을 하며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https://v.daum.net/v/20240718103352692
위 기사를 읽으면서 가장 황당했던 건, 사측의 코멘트였다.
"MBC 사측 관계자는 본지에 .... “대화의 문이 열려 있는데도 회사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외부 기관을 끌어들이려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는 행동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외부 기관이란 고용노동부일까,
아니면 기자회견에 참여한 언론 관련 시민단체나 활동가를 가리키는 말일까.
해당 기자회견이 있기 일주일 전인 7월 11일, 같은 장소에서는 [힘내라 MBC 콘서트]가 열렸다. MBC의 '직원' 그러니까 '언론노조 MBC 본부에 조합원으로 자격 있는 정규직'들은 물론, 정치인과 교수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무대에 올랐고 현장에는 1천여 명의 시민들도 함께했다.
지인이 공유해 준 걸 보니, 그날 무대에 오른 '정규직' PD가 '힘없는 사람들이 찍소리도 내지 못할 때 대신 찍소리를 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언론은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시민들은 '지키자 MBC'를 함께 외친다.
이처럼 시민 사회의 연대를 방패로 두른 MBC가 사내 소수 직군, 방송작가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는 '외부 기관을 끌어들인다'며 힐난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가짜 3.3 노동자'에 대한 기획 리포트를 연달아 내보내면서 비정규직 백화점이라 불리는 방송국 내부로는 마이크를 들이대지 않는 건 비겁하다. '힘없는 사람들'을 대신해 찍소리 내주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면서 방송국 내 비정규직이 겨우 낸 찍소리는 외면하는 MBC. 방송업계에선 정의로운 언론인이 노동자이면서 비정규직들에게 사용자, 즉 갑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영영 모르는 척할 것인가.
좀더 과거로 돌아가서...
2017년 겨울,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언론 탄압으로 기나긴 암흑기를 보냈던 MBC는 드디어 파업을 마무리하고 투쟁 끝에 복직한 해직 언론인들을 레드카펫 깔고 맞이했다. 당시 나는 방송계 비정규직을 위한 조직화 활동 등을 하고 있었기에 한 언론사에 신임 사장에게 보내는 글 한 편을 기고했다. 그동안 연대했던 방송 비정규직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고충을 살펴 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PD수첩]의 PD로부터 방송 비정규직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연락을 받아 만나기도 했다. 아마 활동가 한 명과 함께 미팅에 참석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수년이 지나서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여러 번 "이걸 정말 방송하실 수 있어요?"라고 물었던 건 기억난다. 역시 그런 방송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체 난 뭘 기대했던 걸까. 그때는 나도 참 순진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나 보다.
물론 5년 만에 해직 언론인들이 복직하고 그들 중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 사장 자리까지 올라 한껏 흥이 난 잔칫집에 불청객으로 난입해서 '갑질이나 하지 마라, 이 사용자님들아!'하고 상을 엎을 수야 없지 않나. 그저 넌지시 '앞으로 잘 해보자'고 (그들은 읽지도 않을) 글이나 끄적이는 것이 우리 '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리고 상식 수준의 믿음도 있긴 했다. '가짜 3.3 노동자' 같은 걸 취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곁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돌아보고 그 모순에 대해 고민하게 될 거라고.
그러나 서두에 썼듯, 그렇게 복직한 정의로운 언론인이 사장이고 보도국장일 때 MBC에서는 방송작가들이 별 이유없이 해고 당했다. 물론 MBC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러 방송사에서 여러 시덥잖은 이유로 작가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용기있는 작가들이 투쟁해 표준계약서도 거의 정례화되고 일부는 근로자로 인정받아 복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너무 쉽게 해고 당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나는 1년 6개월 간 일했던 프로그램에서 해고 당했다.
당사자가 되어보니 정의로운 언론인들, 그러니까 나의 '갑'들은 내가 그들과 같은 '노동자'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팀장이 거짓 명분으로 나에게 '자진 사직'을 압박하던 당시, 본사 CP를 면담했다. 그는 충분히 나를 위로해 주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팀장이 만들고 싶은 팀이 있다고 하면 관리자로서 해보라고 말해야 할 것도 같고요."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해고를 당한 내가 오늘이 마지막 근무라고 또 다른 본사 CP에게 인사하자, 그는 언제나 그렇듯 온화한 목소리로 "다음에 또 좋은 기회로 만나면 되죠. 방송일 안 할 거 아니잖아요?"라고 했다.
어쩌면 그리 쉬울까. 그러니까 방송국에서 방송작가는 분위기 쇄신을 위해 사무실 책상 배치를 바꾸듯이 갈아치울 수 있는 존재다. 나의 '갑'들은 프리랜서도 일해서 받은 임금으로 쌀 사고 옷 사고 세금 내면서 산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해고 문제를 노동조합과 함께 해결해 보려 했으나 사측은 '대리인 자격이 의심스럽다'며 대화를 거부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아니라서일까. 나와 노조는 무시당했다. 해고 사유도 그들이 적는 대로 답이 되었다. 사측은 '소명의 기회는 없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익숙한 구호가 정규직에게만 허용되는 이상한 비정규직 나라, 방송국.
이곳에서 17년을 일하며 처음 겪은, 부디 마지막이길 바라는 나의 '해고'에 관해 차근차근 기록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