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살의 카일 맥도널드는 여자친구가 집세며 생활비까지 내주는 백수 청년이었어요. 어느 날 더 이상 월세를 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빨간 클립 하나’를 가지고 집을 나선 것!그는 빨간 클립 하나를 물고기 펜 하나와 교환합니다. 그리고 물고기펜을 문손잡이 하나로, 문손잡이를 캠핑스토프로 교환하죠. 그렇게 총 14번의 물물교환 끝에 그가 손에 쥔 건 꿈에 그리던 내 집이었습니다. 빨간 클립 하나로 2층집을 가지게 된 거죠. 그는 물물교환에 있어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거 앤드 베터(Bigger and Better)’ 즉, 더 크고 더 좋은 것으로 교환할 것!
현명한 거래의 길잡이와 같은 이 이야기가 저는 중고서점에 갈 때마다 생각나곤 합니다.
구매한 모든 책을 집에 쭉 보관하면 좋겠지만, 책을 둘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고 책은 계속 늘어나 주기적으로 중고매매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책에 관한 한 지극히 질척이는 편이라 ‘이건 이래서 안 돼’고 ‘저건 저래서 안 돼’다 보니 팔 책을 선정하는 것부터가 난항입니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모태 미니멀리스트인 남편은 그러고 있는 저를 보며 혀를 끌끌 차며 이야기합니다.
“그냥 다 팔아!”
하지만 이상하죠. 몇 달을 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버렸더니 바로 그 다음 날 그걸 찾는 너댓 살 아이처럼, 내둥 안 보다가 팔고 나면 이상하게 그 책이 생각나고 읽고 싶어져요. 그래서 팔고 나서 결국 다시 산 책도 있지요. 그렇게 질척이고 질척여도 고르긴 고릅니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뿐이죠.
결혼하고 남편이랑 처음 중고 서점에 가던 날은 유독 팔 책이 많았어요. 출판사에 다니던 시절이라 지금보다 책을 많이 사기도 했었고, 신혼집이 좁아서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큰 맘 먹고 눈 딱 감고 30권이 넘는 책을 골라냈습니다.
팔려는 물건이 무겁고 부피가 커서겠죠? 아니면 중고서점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탓일까요? 그날 남편이 기대에 차서 말했어요.
“오늘 저녁에 책 팔아서 소고기 좀 먹나?”
저는 그냥 씨익- 웃었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일종의 비웃음?
‘이 사람 세상 물정 모르네’ 싶은 마음이었달까요?
저는 그저 속이 쓰렸어요. 잘 팔아도 산 가격대비 10~20퍼센트 가격 받게 못 받을 텐데, 어떤 건 심지어 균일가로 1000원에 팔릴 텐데, 나에겐 그 가치 이상의 책들이기에 속상하기만 합니다. 중고서점 문 앞에서 도착해서도 안 팔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소즉득 다즉혹(少則得 多則惑), ‘덜어내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된다’는 노자의 <도덕경> 22장 말씀을 되새기며, '미혹되지 말지니' 하는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겨놓습니다.
띡- 띡- 띡- 띡-
한 권 한 권 바코드가 찍히고, 서점원 분의 검수를 거쳐 정든 책들이 중고서점에 팔려 나갔습니다.
“정산은 현금으로 받으시겠어요. 적립금으로 넣어드릴까요?”
고기 사먹을 만큼은 아니지만 (먹을 수 있다면) 저녁은 먹어야 하니 현금을 선택합니다. 최종 정산을 하려는 찰나 “자자자-잠깐만요. 이건 빼고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질척이는 건 이제 그만, 나가려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 잡고 순간을 모면합니다.
‘잘가라. 많이 못 읽어줘서 미안해.’
왜 아니겠어요. 팔려나가는 책들은 대부분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에요. 그동안도 안 읽었고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기에 파는 책들이었습니다. 읽었던 책들은 그 책의 어떤 부분이 좋은지 알고 있어서, 언제고 펴보고 싶을 때가 있을 거 같아 중고매매를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요. 그래서 제가 파는 책들의 상태는 거의 대부분 최상! (옷도 그렇지 않나요? 많이 입고, 즐겨 입는 옷은 못 버리고, 결국 버리게 되는 건 사놓고 옷장에만 쳐박아놓은 것들.)
서점에 왔는데 그냥 갈 수 있나요. “잠깐 둘러나 볼까?” 하고 중고서점 탐색을 시작합니다. 대형서점이나 동네서점이랑은 책의 배치부터가 달라서 이곳만의 재미가 있죠.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신간을 정가보다 싸게 살 수도 있고, 어릴 적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 지금은 소장하고 있지 않은 추억의 책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고, 시리즈물에서 비어 있는 번호의 책을 채워 넣을 수도 있죠. 잠깐 둘러만 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손에 쥐기 어려울 정도로 책을 고르고, 아예 본격적으로 책 바구니를 찾아 들고 신나게 돌아봅니다. 그리고 추리고 추려, 고르고 골라 8권을 들고 카운터로 갔어요.
띡-띡-띡-띡-
다시 바코드를 찍는 시간, 책을 팔 때의 바코드 소리보다 살 때의 바코드 소리가 더 경쾌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54800원입니다.”
8권 가격 치고 싸지 않나요?신간도 섞여 있는데 말이에요. 게다가 ‘신에겐 아까 책을 판 현금까지 있습니다만’. 지금 이 순간 슬픈 건 책 팔아 소고기 먹나 기대했는데, 돈가스 마저 날아가버린 현실을 마주한 씁쓸한 표정의 남편뿐.
“와, 8권 사는데 5천원 밖에 안 들었어.”
수십 권의 책을 팔고 고작 8권의 책 얻었으면서, 그것도 돈을 보태서 샀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 책을 팔러왔다 되레 책을 사서간다는 현실은 뒤로 한 채 마냥 기분이 좋아 신이 납니다. 정든 책 못 팔겠다고 질척이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새 책이 좋아서 헤벌레 웃는 사람만 존재합니다.
좋아하는 저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남편이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빨간 클립’ 이야기를 건내더군요. 한참을 이야기 하더니, “클립 주인이랑 너랑 완전 반대야. 그치?” 하며 매번 더 크고 나은 것으로 바꿨던 빨간 클립의 주인과 달리, 저는 30권이 넘는 책을 8권으로 바꾸고, 게다가 돈을 더 얹어 주고도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좋아하는 게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거래는 왜 하는 거냐며, 차라리 그냥 팔지 않는 게 이득이겠다’라고 중고서점 방문의 소회를 밝혔습니다.
(남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빨간 클립 한 개>라는 책을 사서 읽었음을 고백합니다. 중고로요.)
하지만 모르는 말씀. 저도 빨간 클립 거래와 다르지 않은 거래를 했는 걸요? 그저 Bigger가 아닐 뿐 Better는 맞으니까요. 안 읽는 책을 가져다주고 읽고 싶었던 책으로 바꿔왔는데 뭐가 문제인 거죠? 열 번 생각해도 똑똑한 거래 맞는데,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요즘도 자주 중고서점에 갑니다. 질척이는 마음은 여전히지만 나올 때는 함박 웃음 짓고 있지요. 손에 새로운 책을 들고, 클립 하나로 집 한 채를 사오는 마음으로 말이에요.
그나저나 '덜어내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된다’는 노자의 말은 중고서점 거래에 어찌나 딱 맞는지요. 덜어냈더니 바로 얻어지는 놀라운 곳, 중고서점! 역시 옛 현인의 말은 틀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