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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람 Oct 06. 2024

중고책 거래에 임하는  우리의 현명한 자세

feat. 빨간 클립 한 개

스물다섯 살의 카일 맥도널드는 여자친구가 집세며 생활비까지 보태주는 백수 청년이었어요. 어느 날 더 이상 월세를 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집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빨간 클립 하나’를 가지고 집을 나선 것! 그는 빨간 클립 하나를 물고기 펜 하나와 교환합니다. 그리고 물고기펜을 문손잡이 하나로, 문손잡이를 캠핑스토프로 교환하죠. 그렇게 총 14번의 물물교환 끝에 그가 손에 쥔 건 꿈에 그리던 내 집이었습니다. 빨간 클립 하나로 2층집을 가지게 된 거죠. 그는 물물교환에 있어 하나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거 앤드 베터(Bigger and Better)’ 즉, 더 크고 더 좋은 것으로 교환할 것!


현명한 거래의 길잡이와 같은 이 이야기가 저는 중고서점에 갈 때마다  생각나곤 합니다.



구매한 모든 책을 집에 쭉 보관하면 좋겠지만, 책을 둘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고 책은 계속 늘어나 주기적으로 중고매매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책에 관한 한 지극히 질척이는 편이라 ‘이건 이래서 안 돼’고 ‘저건 저래서 안 돼’다 보니 팔 책을 선정하는 것부터가 난항입니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모태 미니멀리스트인 남편은 그러고 있는 저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이야기합니다.


“그냥 다 팔아!”


하지만 이상하죠. 몇 달을 안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버렸더니 바로 그 다음 날 그걸 찾는 너댓 살 아이처럼, 내둥 안 보다가 팔고 나면 이상하게 그 책이 생각나고 읽고 싶어져요. 그래서 팔고 나서 결국 다시 산 책도 있지요. 그렇게 질척이고 질척여도 고르긴 고릅니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릴 뿐이죠. 


결혼하고 남편이랑 처음 중고 서점에 가던 날은 유독 팔 책이 많았어요. 출판사에 다니던 시절이라 지금보다 책을 많이 사기도 했었고, 신혼집이 좁아서 놓을 데가 마땅치 않아 큰 맘 먹고 눈 딱 감고 30권이 넘는 책을 골라냈습니다.


팔려는 물건이 무겁고 부피가 커서겠죠? 아니면 중고서점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탓일까요? 그날 남편이 기대에 차서 말했어요.


“오늘 저녁에 책 팔아서 소고기 좀 먹나?”


저는 그냥 씨익- 웃었습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일종의 비웃음?

‘이 사람 세상 물정 모르네’ 싶은 마음이었달까요?


저는 그저 속이 쓰렸어요. 잘 팔아도 산 가격대비 10~20퍼센트 가격밖에 못 받을 텐데, 어떤 건 심지어 균일가로 1000원에 팔릴 텐데, 나에겐 그 가치 이상의 책들이기에 속상하기만 했습니다. 중고서점 문 앞에서 도착해서도 안 팔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소즉득 다즉혹(少則得 多則惑), ‘덜어내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된다’는 노자의 <도덕경> 22장 말씀을 되새기며, '미혹되지 말지니' 하는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씩 옮겨놓았습니다.


띡- 띡- 띡- 띡-

한 권 한 권 바코드가 찍히고, 서점원의 검수를 거쳐 정든 책들이 중고서점에 팔려 나갔습니다.


“정산은 현금으로 받으시겠어요. 적립금으로 넣어드릴까요?”


고기 사먹을 만큼의 액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저녁은 먹어야 하니 현금을 선택했습니다. 최종 정산을 하려는 찰나 “자자자-잠깐만요. 이건 빼고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질척이는 건 이제 그만,  나가려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고 순간을 모면합니다.


‘잘가라. 많이 못 읽어줘서 미안해.’


왜 아니겠어요. 팔려나가는 책들은 대부분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이에요. 그동안도 안 읽었고 앞으로도 안 읽을 것 같기에 파는 책들이었습니다. 읽었던 책들은 그 책의 어떤 부분이 좋은지 알고 있어서, 언제고 펴보고 싶을 때가 있을 거 같아 중고매매를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요. 그래서 제가 파는 책들의 상태는 거의 대부분 최상! (옷도 그렇지 않나요? 많이 입고, 즐겨 입는 옷은 못 버리고, 결국 버리게 되는 건 사놓고 옷장에만 쳐박아놓은 것들.)


30권 넘게 책을 팔았지만 손에 쥔 건 채 5만원이 되지 않습니다.


“소고기는 어렵겠네? 뭐 돈가스라도 먹자! 돈가스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들어가면 딱이겠다!”


그렇게 한껏 작아진 소망을 선언하고 밖으로 나가려던 남편을 저는 돌려세웠습니다. 서점에 왔는데 그냥 갈 수 있나요. “잠깐 둘러나 볼까?” 하고 중고서점 탐색을 시작합니다. 중고서점은 대형서점이나 동네서점이랑은 책의 배치부터가 달라서 이곳만의 재미가 있죠.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신간을 정가보다 싸게 살 수도 있고, 어릴 적 너무 재밌게 읽었는데 지금은 소장하고 있지 않은 추억의 책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고, 시리즈물에서 비어 있는 번호의 책을 채워 넣을 수도 있죠. 잠깐 둘러만 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손에 쥐기 어려울 정도로 책을 고르고, 아예 본격적으로 책 바구니를 찾아 들고 신나게 돌아봅니다. 그리고 추리고 추려, 고르고 골라 8권을 들고 카운터로 갔어요.


띡-띡-띡-띡-

다시 바코드를 찍는 시간, 책을 팔 때의 바코드 소리보다 살 때의 바코드 소리가 더 경쾌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54800원입니다.”


8권 가격 치고 싸지 않나요? 신간도 섞여 있는데 말이에요. 게다가 ‘신에겐 아까 책을 판 현금까지 있습니다만’. 지금 이 순간 슬픈 건 책 팔아 소고기 먹나 기대했는데, 돈가스 마저 날아가버린 현실을 마주한 씁쓸한 표정의 남편뿐.  


“와, 8권 사는데 5천원 밖에 안 들었어.”


수십 권의 책을 팔고 고작 8권의 책 얻었으면서, 그것도 돈을 보태서 샀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 책을 팔러왔다 되레 책을 사서간다는 현실은 뒤로 한 채, 생일 선물을 품에 안은 아이처럼 마냥 기분이 좋고 신이 났습니다. 정든 책 못 팔겠다고 질척이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새 책이 좋아서 헤벌레 웃는 사람만 존재했습니다.


좋아하는 저를 보며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짓던 남편이 어디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빨간 클립’ 이야기를 건내더군요. 한참을 이야기 하더니, “클립 주인이랑 너랑 완전 반대야. 그치?” 하며 매번 더 크고 나은 것으로 바꿨던 빨간 클립의 주인과 달리, 저는 30권이 넘는 책을 8권으로 바꾸고, 게다가 돈을 더 얹어 주고도 큰 선물을 받은 것처럼 좋아하는 게 신기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거래는 왜 하는 거냐며, 차라리 그냥 팔지 않는 게 이득이겠다’라고 첫 번째 중고서점 방문의 소회를 밝혔습니다.(남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빨간 클립 한 개>라는 책을 사서 읽었음을 고백합니다. 중고로요.)


하지만 모르는 말씀. 저도 빨간 클립 거래와  다르지 않은 거래를 했는걸요? 그저 Bigger가 아닐 뿐 Better는 맞으니까요. 안 읽는 책을 가져다주고 읽고 싶었던 책으로 바꿔왔는데 뭐가 문제인 거죠? 열 번 생각해도 똑똑한 거래 맞는데,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만.




요즘도 자주 중고서점에 갑니다. 질척이는 마음은 여전히지만 나올 때는 함박웃음 짓고 있지요. 손에 새로운 책을 들고, 클립 하나로 집 한 채를 사오는 마음으로 말이에요.


그나저나 '덜어내면 얻게 되고 많으면 미혹된다’는 노자의 말은 중고서점 거래에 어찌나 딱 맞는지요. 덜어냈더니 바로 얻어지는 놀라운 곳, 중고서점!  역시 옛 현인의 말은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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