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의 장난질
조금은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평소엔 문제 되지 않았던 일들이 '문제'로 보이기 시작했다.
늘 쓸고 닦던 따뜻했던 내 집 살림에서 손을 놓았다.
당장, 화장실 세면대와 유리에 얼룩이 생겨 신경 쓰였지만 눈을 감고 나와버렸다.
당분간은 불편해도 내 몸을 혹사시키지 않기로 했다.
폐경진단 후, 생리유도 주사를 맞았다.
일주일 안에 생리를 다시 할 거라고 했지만,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생리는 아직.
확실히 생리유도 주사를 맞은 후,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른바 '부작용' 증상 중 하나였다.
평소보다 과한 '프로게스테론'이 몸에 들어오면 이상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주사를 맞고 며칠간 과도하게 열이 나서 힘들었다. 후끈후끈... 몸이 쓸데없이 덥고 무겁게 느껴졌다. 호르몬이 본격적으로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틀이 지나자 열은 조금씩 내렸지만, 내내 우울했다.
그냥 우울했다,라고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조금 더 자세히 감정 상태를 말해보자면 '극심하게 우울했다'.
무기력한 기분. 처음 느껴보는 감정 중 하나였다.
앉아도, 누워도... 걸어도 모두 편치 않았다. 깊은 잠을 잘 수 없어서 새벽이면 몇 번씩 깼다. 중간중간 춥고 떨리는 오한도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어떤 날은 심박동 수가 너무 빨라 어지러웠다. 습관적으로 마시던 커피를 마셨을 뿐인데 심박동 소리가 바깥으로 요동치는 듯했다.
이렇게나 부작용이 살벌하다고?
사흘이 지나자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든 건,폭발적인 'PMS 증후군'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최대치의 'PMS 증후군'. 세포 하나하나가 예민해졌다. 작은 소리에도 정신이 날카로워졌다.
통상적으로, 생리하기 전 여자들은 이 'PMS 증후군'을 앓는다. 평소와는 다른 기분 때문에 줄곳 '기분이 태도'가 되곤 한다.
이 증상들이 유독 도드라진 것은, 프로게스테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유 없이 불안하거나 우울해지는 감정들, 이 증상이 생리 전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징후들이다.
남편과 늘 가장 많이 다투게 될 때도, 이 증후군이 시작되는 한 달의 반복되는 어느 시점이었다. 18년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이 증후군이 시작되면 남편은 나를 가장 어려워했다. 생경하고 낯설고 불편한 아내의 모습들.
'생리유도주사'를 맞고 내내 이 증상이 가라앉질 않았다. 극심하게 괴로웠다. 내 감정이 내 맘대로 안 되는 느낌은 무척 고통스러웠다. 이유 없이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감정들. 힘없이 팔랑거리는 종이장처럼 무기력해져 왔다.
내 방을 기웃거리다가 방 문 턱을 넘을까 말까 고민하는 막내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맘이 찢어지는 것 같다. 어미품조차 내어주지 못하는 비정한 엄마라니!. 부정의 감정들이 내 영혼을 갉아먹는 이 기분. 정말 멈추고 싶다. 그런데 잘 안된다.
힘들어 보이는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착한 남편 앞에서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는... 당신과 주재원 다녀온 5년간, 내 경력이 텅 비었어. 이런 나를 누가 뽑아주겠어. 이러니 매번 이력서를 낼 때마다 연락 한 통 못 받았지. 나도 당신처럼 계속 일하고 싶었어. 나도 되고 싶은 게 많았어! 그래서 애들 임신해도 끝까지 회사 다니며 버텼어. 애들 낳고 바로 일에 뛰어드느라 쉬어보지도 못했어. 그런데 난.... 아무것도 된 게 없어! 지금 난... 아무것도 된 게 없잖아..."
가슴에 쌓인 서러움을 토해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왜 그런 얘기를 남편한테 퍼부었을까.
그건 남편의 잘못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인데...
난 생리유도주사를 맞고, 호르모의 장난질에 분명 놀아난 거다.
'생리유도주사'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셌다.
폐경진단 이후 벌어지는 감정의 과정을 굳이 왜 기록해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가족 중 나와 같은 아내가 있다면, 혹은 나와 같은 엄마가 있다면... 따뜻하게 안아주는 마음으로 그녀를 이해하고 보듬어 달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 글이 그녀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최대한 자세히 내 감정을 기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폐경은 여자라면 일생에 한 번은 꼭 겪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기에 마음도 복잡해진다. 뭔가 줬다 뺏는 기분처럼 허무하고 억울한 마음은 덤으로 따라붙었다. 인생의 시간들을 수없이 되돌아보게 되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죽도록 미워진다. 후회되는 일들은 더 후회되고, 괜찮다고 넘길 일들엔 안 괜찮아야 할 이유가 생겨난다.
마치 다시 시작되고 있는 '사춘기'의 매운맛 버전이라고 할까.
호르몬의 장난질 때문에 , 생각보다 당신이 아는 그녀는 너무 힘든 내적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 모른다.
이성도 감성도, 호르몬 앞에선 처참히 무너진다.
나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