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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Sep 29. 2024

보험

mayol@골계전 30. 보호받지 못할 낡은 것들

 고속도로 중간중간에 설치된 '졸음 쉼터'에 가까스로 차를 옮겨 세워놓고 벤치에 앉았다.

 꼼짝 않는 쪽구름들이 파란 가을 하늘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앞으로 굉음을 내며 차들이 질주했다.

 시끄러우면서도 동시에 고요함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내딘 길이라 졸음이 쏟아지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문득 릴케의 시 한구가 떠 올랐다.


 [장미여, 오오 순수한 모순이여, 수많은 누까풀 아래서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는데 내 차 뒤로 버스 한 대가 들어오더니 사람들이 내렸다.

 버스기사는 버스허리에 달린 짐칸에서 접이식 테이블을 꺼내어 졸음쉼터 한편에 펼쳤다. 그리고는 온갖 음식을 올려놓기 시작했다.


 '뭐지... 여기서 제사를 지내려나.'


 호기심에 고개를 돌리고 선글라스 너머로 버스기사의 행동을 관찰했다.

 버스기사는 과거 코미디언 이주일 씨의 헤어스타일과 비슷했다.

 양 옆으로 수북하게 자란 머리카락이 귀를 덮고 있었지만 정작 이마부터 정수리까지는 잘 다듬어진 아스팔트처럼 매끈하게 길이 나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이마에 땀이 맺히는 게 보였다. 그때 버스 전면에 붙여 놓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혼주 김말복•자양분 님의 하객]


 어느 집의 부모가 버스를 대절해 고향사람들을 결혼식장으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버스기사가 음식을 한 상 차리자 하객들이 하나 둘 달라붙어 먹기 시작했다. 생경한 풍경이었다.

 장시간 이동해야 하는 하객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휴게소에서 상을 차리기 애매해서인지 인적이 뜸한 졸음쉼터를 이용하나 싶었다.

 아침부터 굶었던 터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내가 왜 이곳에 앉아 있는지 깨닫고는 휴대폰을 들어 H해상에 전화를 걸었다.

 나 역시 인천 송도에서 오후 네시에 친구 딸아이의 결혼식이 있어 서둘러 지방일을 마치고 상경하는 도중이었다.

 갑자기 손도 대지 않은 와이퍼가 왔다 갔다 하더니 라디오가 꺼져버리고 크루즈 기능이 됐다가 안 됐다가를 반복해서 차를 가까운 졸음쉼터에 세운 거였다.

 두 달 전 대전에서 치러진 조카의 결혼식장에 가면서도 차의 냉각수 보조통이 터져 고생했던 생각이 나서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올드카를 몰고 다니는 사람으로서 각오해야 할 현상 중 하나일 뿐이었다.


 "네? 배터리가 방전돼서 나오는 현상 같은데 왜 꼭 견인차를 불러야 하죠?"

 "네, 고객님. 고속도로에서는 휴게소가 아닌 장소는 안전지대가 아니어서 견인차 서비스만 가능합니다. 고객님."

 "졸음쉼터가 안전지대가 아니라뇨? 배터리 점프만 하면 될 텐데 왜 견인까지 해야 하는 거예요?"

 "보험 정책 때문입니다. 고객님."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RV 한 대가 졸음쉼터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 일단 전화 끊을게요. 점프를 한 번 해 보고 안되면 다시 전화드릴게요."


 그사이 식사를 마친 하객들은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오면서 죄다 내 차에 달라붙어 구경했다.


 "워매, 이 차가 굴러간다냐."

 "저거슨 돈을 마구 잡아묵어브러. 아주 징한 차랑게."

 "선상님은 이 차를 어뜨게 몰고 다니지라. 참 용하시네요. 하하."


 답변할 내용이 하나도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화장실 앞에 막 정차하고 있던 RV로 달려가 창문을 두드렸다. 운전자가 담배를 챙겨 나오려는 참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차를 내 차 가까이 붙였다. 트렁크에 싣고 다니는 점프선을 꺼내서 배터리에 물렸다. 하지만 여전히 '틱틱' 소리만 낼뿐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배터리의 전압이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RV차주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보험사에 전화를 걸었다.

 아까와는 다른 상담원이었다.


 "네. 고객님이 계신 졸음쉼터 이름이 뭔가요?"

 "000 졸음쉼터예요."

 "알겠습니다. 고속도로라서 한 삼십 분은 기다려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벤치에 앉아 전화기를 내려놓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식사를 마친 하객들이 다시 버스에 오르자 운전기사는 상다리를 접어 다시 버스 짐칸에 실었다.


 "다 타셨지요. 출발합니다."


 하객을 잔뜩 실은 버스가 내 차 옆을 스쳐 지나가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보험사마저 외면한 낡은 차다. 나 역시 이 차와 함께 낡아가고 있다. 우리는 서로 아껴야 해.

 

 한참을 앉아 있었다.

 30+ɑ분이 지나서야 보험사 차량이 졸음쉼터로 진입하는 게 보였다.

 조치는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사장님, 사용하시던 점프선은 제대로 충전을 시키지 못할 거예요. 좋은 걸로 장만하세요. 그리고 배터리는 수명을 다해 전압까지 낮아진 상태니까 이대로 서울까지 달리셔야 합니다. 시동을 절대 끄시면 안돼요."


 보험사 차량이 먼저 출발하고 나서 화장실로 갔다. 서울까지는 차를 세울 수 없으니 몸속의 물기를 완전히 제거해야 했다.

 다시 차를 몰고 고속도로에 올라서는 크루즈 기능을 끄고 액셀을 밟아 속도를 조절했다. 되도록이면 전압에 영향을 주는 기능은 끄는 게 안심이 되었다.

 운전하는 내내 보험사 상담원의 두 가지 대답에 의구심이 들었다.

 한 상담원은, [졸음쉼터는 안전지대가 아니므로 무조건 견인차를 보내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상담원은, [졸음쉼터에 계시면 안전하니까 배터리 충전 서비스를 보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 보험사에 규칙은 무엇일까.

 상담원마다 다른 대답을 한다면 보험 가입자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건가.

 또 이런 일도 겹쳐져 고개가 갸우뚱했다.

 자차 보험 가입에 관한 대답이었다.


 [고객님의 차량은 오래돼서 자차보험 승인이 나기 힘들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한때는 [내 차 십 년 타기 운동] 같은 캠페인을 벌여 차를 오래 타자고 격려했었는데, 차를 오래 타면 자기 차량 손해에 대하여 보험을 들어줄 수 없다니, 모순 아닌가.

 새 차만 혜택을 받는 보험이라면, 3년이나 5년에 한 번씩 차를 바꾸는 사람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나이 탓에 한 국립 문화시설 임용심사에서 탈락한 직후 떠난 길이어서 더 마음이 현란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부터 찾았다.

 그리고는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다시 인천 송도로 달려갔다.

 오래된 차나 오래된 사람이나 그 가치를 증명받고 존중받을 기회가 사라지는 걸 목격한 아주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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