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ol@골계전 26. 태양 가득한 그의 패션
나의 리즈시절 평일 오후였다.
기타를 메고 경기도 모처의 대학교에서 열린 샹송대회에 출전한 날이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교정으로 들어서자 대회에 참가하려는 팀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다.
여러 팀이 무대를 오르락내리락했고 우리 팀이 무대에 오르기 전에 깜짝 이벤트가 있었다.
전년도 우승팀이었던가 아니면 찬조 출연이었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단한 포스를 지닌 남녀가 무대에 올랐다.
담배를 손에 들고 엄지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한 남학생이 마이크 옆에 서 있었고 이윽고 여학생 하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드디어, 시작인지 아닌지 뜸 들일틈도 없이 빠른 전주가 흐르고 마이크를 잡은 농익은 남학생이 읊조리듯이 가사를 읊었다.
“C'est etrange, je n'sais pas ce qui m'arrive ce soir, Je te regarde comme pour la premiere fois.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오늘밤은 그대가 새롭게 보이는군요.”
그러자 여학생이 되받아 쳤다.
“Encore des mots toujours des mots les memes mots… 뭐야, 또 그 말을 하는 거야…”
남자는 끝없이 여자를 향해 구애를 했고 여자는 남자의 입에 발린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Tu es comme le vent qui fait chanter les violons et emporte au loin le parfum des roses. 당신은 바이올린처럼 울리는 바람과 같아서 멀리까지 장미향기를 옮기는군요.”
그러자 여자가 또 되받아 쳤다.
“Caramels, bonbons et chocolats… 캐러멜 사탕 그리고 초콜릿 같은 번지르르한 말들…”
남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Que tu m'ecoutes au moins une fois… Mon seul tourment et mon unique esperance. 제발 한 번만이라도 내 말에 귀를 기울여줄 수는 없을까요… 당신은 나의 유일한 고통이자 희망입니다.”
“Parole, parole, parole… 아휴, 입만 살아서는. 그저 말, 말, 말, 말뿐인 당신…”
원곡은 며칠 전에 천수를 다하고 명을 달리 한 알랭들롱 Alain Delon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일찌감치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칸초네 풍의 여가수 달리다 Dalida가 함께 부른 <paroles paroles 속삭임>이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열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내가 부를 노래의 코드와 가사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기타를 치고 노래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상을 받아 쥐고 돌아온 이상한 날이었다.
그날의 경연이 8미리 필름처럼 촤르르르 소리를 내며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이 장면보다 더 오래된, 알랭들롱에 대한 추억이 깊게 새겨져 있다.
⌜주말의 명화⌟가 시작되자 나는 누나들과 형이 착석한 틈을 비집고 앉아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저녁부터 켜 놓은 브라운관 티브이가 열을 내며 방안 공기를 후끈하게 데웠고 숨쉬기도 곤란할 정도의 미남배우 알랭들롱이 등장했다.
영화의 제목은,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였다.
가난한 리플리(알랭들롱 분)가 동창이자 부잣집 아들인 필립(모리스 로넷 분)과 가까워지면서 그의 연인 마르쥬(마리 라포넷 분)를 만나게 된다.
리플리는 친구의 부와 사랑스러운 연인을 독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끝내 남자를 지중해의 한 바다에 수장시켜 버린다.
그리고는 돈과 여자를 다 차지하게 되는데… 그렇게 잘 끝나가던 영화의 말미에 요트 밑에 묶어둔 친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리플리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다는 일장춘몽 같은 영화였다.
나는 이 영화의 내용보다는 리플리와 필립이 함께 선착장으로 놀러 나가는 장면에서 뇌가 정지되어 있다.
둘의 패션이 너무 멋있었기 때문이었다.
발목까지 오는 짧은 바지와 흰 (리넨) 셔츠 그리고 보트 슈즈(로퍼)…
당시로서는 길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패션이었다.
'아, 뭐지. 뭐가 저렇게 멋있는 거야.'
누나들이 나의 열망을 눈치채고 월급날이 되면 명동을 구석구석 뒤져 로퍼와 승마바지 같은 것들을 사 와 입혀주곤 했었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자주 물었다.
“야, 너는 도대체 그런 옷과 신발을 어디서 구하는 거야?”
그리고 지금도 묻는다.
“야, 너는 아직도 그 코트를 입고 다니냐?”
내가 알랭들롱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영화 속 주인공과 구별하기 힘든 패션이었다.
개발에 편자라고나 할까.
어쨋거나, 내 인생 가장 강력하게 패션 감각을 심어준 알랭들롱을 추억하며 그의 속삭임을 듣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