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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Sep 15. 2024

다니노스와 김수영

mayol@골계전 28. 나는 딜레땅뜨일까 스노브족일까?

 새벽 선잠에서 잠깐 동안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어, 어어어! 안돼!!"


 눈을 뜨고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

 이런 새벽에 깜짝 놀라 눈을 떴는데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면 책 읽기 딱 좋은 시간이다.

 책상 앞에 앉아 뭐를 ‘안된다’고 한 건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뭐가 안된다고 한 것일까.'

 1분 2분 5분… 아무리 생각해도 떠 오르지 않을 때, 그런 때도 책 읽기 좋은 때다.

 그래서 오래되고 낡은 책을 집어 들고 돌아 앉았다.

 책을 여는 순간 만취상태에서 심야버스에 치여 죽은 시인 김수영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 올랐다.


 "딜레땅뜨 Dilletante !!"


 왜 그는 그 많은 시어와 문장 중에 하필 딜레땅뜨라는 말을 남기고 갔을까.

 흔들리는 틀니로는 발음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이 프랑스어 ‘딜레땅트’를 발음하려면 정확히 네 번 혓바닥으로 대문니를 밀어내듯이 강하게 발음해야 한다.

 틀니를 끼고 다녔던 김수영에게는 버거운 일이었을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오려는 틀니를 잇몸으로 막고 이 발음을 강하게 했다는 건 속에 쌓인 울분이나 열 받는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게 분명하지 않았을까. 또한 입에 들어간 술과 안주가 틀니와 함께 튀어나오는 것을 방지해야 했으니 발음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최대한 안전하게 틀니와 음식물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잇몸에 힘을 주고 소리를 질렀겠지.


 "이뤈, 딄뢯똮뜝!!"


 김수영의 친구였던 소설가 이병주가 그 욕의 수혜자였다는데, 듣는 순간 '무슨 소리지?'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펼쳐 든 책에서 첫 번째 눈에 띈 단어가 스노비즘 Snobisme이었다.

 딜레땅뜨나 스노비즘은 서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체'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딜레땅뜨]는 지식인 인척 예술인 인척 하는 사람들을 일컫고, [스노비즘]은 상류층 인척 잘 나가는 척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두 부류가 모두 일종의 자기 체면을 중시하거나 상대적 빈곤감 혹은 자격지심이 강한 사람들을 구별해 사용했던 말인데, 과거 프랑스에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책을 읽다 보니, 어쩌면 시인 김수영은 스노브족族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때 유복했던 그가 반평생을 힘들게 살았으니, ‘나도 한때 방귀께나 뀌던 서열의 사람이었어!’라며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일종의 방어적 기재로 자신보다 지식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돈 많은 문학인의 자존심을 뭉개기 위한 발언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딜레땅뜨 아닌 사람도 있을까? 한때 스노브족이 아니었던 사람도 있을까?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아니지 않으니까.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이자 작가였던 삐에르 다니노스Pierre Daninos가 1964년에 [Snobissimo ou le Désire de Paraître 속물근성 혹은 자기 과시]라는 책을 발표했었다.

 이 책에서 그는 프랑스의 상류사회와 이를 모방하고 추종하는 쁘띠 브르주와에 대한 사회풍속을 묘사했다.

 미술평론가 이 일이 스노브 Snob에 대해 잘 설명한 글이 있다.


  …… 중략 …… 그는 전람회라면, 그것도 초대일엔 빼놓지 않고 나타나는 사나이이다. 초대일이라고 해서 초대장을 보여라 말라는 일은 없겠으나 어쨌든 회장에 들어선 그는 초대받은 손님에는 틀림없을 것이요 또 그날의 주인공과 악수를 나누는 것을 보면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나 그뿐인가. 그는 회장 안의 조금씩들은 그럴싸하게 보이는 사람들과도 아는 체를 한다. 그러고 나서는 꽤도 엄숙하게 전시된 작품들과 대결한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매우 심각하다. 가끔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또 때로는 한숨 같은 것도 내뿜는다. 그림과의 거리도 재본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서 그는 홀 가운데 마련된 책사에 기대앉아 담배를 붙여물고는 이번에는 작가와 회화론을 하잔다. 작품들은 추상화인데 피카소의 학자부터 튀어나온다. ⌜피카소 적인 선인데…⌟ 그리고는 그저 무연해있는 작가의 스승이 될지 또는 선배가 될지도 모를 화가의 이름들을 아무개 아무개 하며 마치 친구 이름 부르듯 시시쿵하게 늘어놓는다. 옆에서 듣기에는 발 꽤나 넓은 사람 같기도 하다. 아니면 ⌜유명 콤플렉스⌟라는 말을 본뜨건대, ⌜유명 콤플렉스⌟에 걸린 사람 인지도 모른다. (하기는 이 콤플렉스인즉 만인 공통의 것인가 싶으며 특히 이즈음 한창 창궐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말할 것도 없이 나도 그 한 사람. …… 어쨌든 그 사나이는 꽤나 유식한 말을 떠들어대다가 자리를 뜬다. 그러나 그냥 문을 나갈까 보냐. 입구 탁자 위에 놓여있는 ⌜방명록⌟을 점잖게 뒤지며 이름과 함께 일필을 적는 것이다. <세잔느와 피카소의 동양적인 추상화. 거기에는 동양적 슬기로움과 관조가 서구 정신과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사라지는 그 사나이…… 그것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른다. 속물 만세!


 지난 새벽 들려왔던 비명은, 김수영을 끌어들여 그 뒤에 숨으려고 했지만, 어쩌면 내가 내 귀에 대고 지른 일종의 경각 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딜레땅뜨이면서 스노브족이면서 동시에 이 둘을 완벽하게 결합한 속물俗物일 수도.

 이런 속물을 사랑해 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혼없는 말이었는지는 몰라도 '최고'라는 말을 해 주곤 했었으니까.

 세상의 모든 속물들도 버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은 결국 사랑이라는 생각을 하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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