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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욜 MaYol Sep 08. 2024

므로체크의 계산법計算法

mayol@골계전 27. 믿지 못할 미래씨 <일부 19 금禁>

지난밤에는 평생 나와 동거동락한 미래씨에게 편지를 썼다.


 미래未來 씨,

 우리가 함께 산지도 꽤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정도의 세월을 함께 지냈으면 당신의 모습이 그려질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니 당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면서 상상할 밖에요.
 내일 당신의 모습은 또 어떻게 변할지...

 당신은 어쩌면 그리 야속한가요.
 은행처럼 주말에도 이자를 쌓아가기만 하는 당신, 휴일에는 나이 먹는 것도 쉬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굳이 그래야 한다면 통장에 잔고도 좀 채워주시던가.

 모처럼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너는 수염만 하얗냐?' 물어서 '특별히 수염만 더 하얗다.'라고 했더니, '그럼 음모도 하얗겠네?' 해서 '몇 개 뽑아서 갖다주랴?'라고 대답하고는 모임 내내 그게 궁금해졌습니다.

 친구의 말처럼 수염이 하예지면 은밀한 부위의 털들도 하얘지는 건지...
 당신이 내게 알려줄 수 있는 게 도대체 뭡니까.
 꼭 내 눈으로 일일이 확인해야 해요?
 아, 답답해라.
 알려주지 않겠다면, 우리 이제 헤어져요.

 2024년 9월 8일 새벽,
 당신의 마욜.

   

 동창회 모임에 다녀와서는 유난스럽게 내일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만 간다.

 어려서도 청년기에도 나는 늘 내일에 대해 장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살아온 게 신기하기만 하다.

 동시에, 내일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이 일상이 된 21세기 청년들의 마음이 이해도 되고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혼자 살기로 한 이야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

그의 익살이 그림에서 묻어 나는 지 잘 모르겠다. 나 역시도 저런 눈빛으로 살고 있다.

 슬라보미르 므로체크 Slawomir Mrozék는 폴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드라마와 소설을 발표한 작가였다.

 1930년에 태어난 그는 건축과 회화를 공부했는데 정규 교육을 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글과 그림에 재주가 뛰어났고 그 덕에 풍자만화와 익살스러운 칼럼을 기고하면서 기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스탈린 시절 구소련이 옆 나라 체코를 침공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사회주의에 항거하는 의미로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 가서 살았다.

 체코가 침략을 당했는데 왜 폴란드를 떠난 건지, 사회주의의 침략이 싫었으면 체코에 가서 싸워야지 왜 체코의 반대방향인 프랑스로 날아가 살았는지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어떤 이들은 그가 주변의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해 떠난 거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야 어쨌든, 그의 행동 자체가 유머가 아닐까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 그의 청년기는 어땠을까.


 젊던 어느 날 므로체크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벤치에 앉아 멍하게 하늘을 보고 있었는지 책을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여자가 므로체크를 향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저에게 커피 한 잔 사시겠어요?”


 젊고 아름다운 데다가 섹시한 갈색의 피부를 가진 여자가 대뜸 데이트 신청을 하니 당황스러울 밖에.

 하지만 당시 므로체크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 전이어서 그다지 생활형편이 좋지 못했다.

 여자의 급작스런 데이트 신청에 눈동자가 흔들리던 므로체크는 여자를 앞에 세워놓은 채로 주머니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들었다.


 [커피에 과자를 사면 16졸티, 택시를 잡아 태워 가려면 10졸티, 꽃 한 송이는 선물해야 하니까 꽃값은 30졸티, 함께 무도회에 참석하려면 적어도 80졸티가 필요하겠지… 해가 지면 유람선도 타야 하니까 20졸티,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가려면 다시 택시를 타야 하고 문을 열어주는 수위 아저씨에게 팁까지 주면 약 75졸티가 들어갈 거야.]


 여자는 데이트 신청에 대답은 안 하고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므로체크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놈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므로체크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메모를 이어나갔다.


 [음… 반지가 750졸티, 호숫가 근처에서 바캉스를 하면 한 번 가는데 약 8,000졸티가 필요하지. 게다가 결혼반지는 900졸티 정도가 들어가고 결혼식을 올리면 6,000졸티가 필요해. 신혼집을 채울 식기와 태어날 아기를 위해 요람이며 옷가지를 다 합치면 대강 1,950졸티가 들어가고 장난감과 아기를 봐줄 유모를 들이려면 대략 11,050졸티… 아, 침대도 있어야지. 300졸티. 교육비 약 5,500졸티에 둘째가 태어나면 두 아이 병원비에 교육비 등등 해서 약 47,300졸티. 마누라 옷과 구두값이 싸게 잡아도 한 70,000졸티. 셋째가 태어나면 아이 방도 꾸며야 하고 내 정신상담도 받아야 하니까… 대강 3,300졸티…]


 메모지가 꽉 채워지자 뒷장으로 페이지를 넘기며 므로체크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다 뭐야. 더 계산할 필요도 없겠는걸? 아직 장모나 장인에게 줄 선물 같은 건 계산에 넣지도 않았는데… 또 매해 찾아오는 결혼기념일은 또 얼마가 들어가야 하지? 참, 이렇게 살다가 이혼이라도 하게 되면? 위자료와 애들 양육비는 또 어떡하지?]


 므로체크는 메모지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급기야 식은땀을 흘렸다.

 여자는 뭔가에 집중하고 있는 이 매력적인 남자가 마음에 쏙 들어 자신의 손을 잡아줄 때만 기다리며 다소곳이 서 있었다.

 딸깍!

 므로체크는 볼펜심을 집어놓고 메모지를 덮으며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드디어 이 남자가 일어나는구나’ 싶어서 미소를 지어 화답했다.

 드디어 여자의 바람대로 므로체크가 일어서며 여자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용서하십시오. 저는 도무지 그럴 용기가 나질 않는군요.”

 "뭐가요?"

 "그러게요. 아무튼 당신과 함께 살기는 힘들 것 같군요."

 "어머머, 뭐라고라고라? 이러~언, 새끼(손까락)!!"


 므로체크의 이상한 반응에 흥분한 여자는 씩씩대며 뒤도 안 돌아보고 총총 사라져 버렸다고.


 다행히 나는 므로체크와는 달리 숫자에 아주 둔감하다.

 여자가 말을 걸어오자마자 덥석 손을 잡아 예식장으로 끌고 들어갔으니까.

 일찌감치 현업에서 손을 뗀 지금은 물정에 더 감감하다.

 거의 맹추에 가깝다.

 그래서 남은 반 평생은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할 생각을 한다.

 다행스럽게도 내 곁에는 미래씨가 있지 않나.


 

 미래씨,

 헤어지자는 말 취소할게요.
 글도 열심히 쓰고 일도 더 적극적으로 알아보려고요.
 그리고, 기왕 같이 사는 거 우리 애도 많이 낳아요.
 애가 많으면 얼마나 행복하게요.
 몇이요?
 유정란 반판?

 2024년 9월 8일 아침,
 당신의 사랑하는 마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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