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호주에 5년째 살고 있는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입니다. 본 글은 1인기업가로의 저의 출발이자 저의 브랜드 '더미그나'의 창조과정을 리얼하게 공개하는 글이므로 1편부터 읽어나가시길 권해드립니다.
사람들은 ‘디자이너’하면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것을 주로 떠올린다.
물론,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부의 무언가로 표현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호주대학원 수업 중, 내게 이런 미션이 하달됐다!
‘원주민 마을이 자연재해로 인해 응급상황에 처했을 때, 디자이너로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디자이너에게 홍수의 자연재해에 대한 응급상황에 대해 묻는다!
의외였다.
디자이너로서 나도 우리 지역에 홍수가 났을 때 꼭 필요한 역할이 있었던 것이다.
응급 쉘터(shelter, 대피소) 디자인.
내게 주어진 미션이었다.
내가 리서치를 통해 선택한 지역은 호주의 북쪽지방에 위치한 베스윅(Beswick)이었고, 그 마을은 매년 반복되는 홍수의 자연재해를 겪고 있었다. 사실 이 마을에서는 홍수가 나면 아이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이유는 ‘물’때문이 아니라 ‘악어’때문이었다. 홍수가 나면, 그 물속에 악어가 떠내려오기에, 홍수가 나면 절대 물속으로 들어가면 안 되고, 그 때문에 아이들은 고립된 마을에서 학교를 등교를 못 하는 경우가 반복된다고 했다.
그룹 토론을 통해, 이 마을은 원주민의 문화를 보존하고, 원주민 아트(미술, 음악, 공예등)를 전파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이 지역의 환경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곳의 원주민 문화의 계승을 위해, 이들의 전반적인 환경안정을 위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지었다.
호주로 이민오기 전 나는 판교에 살았었는데 그때 경험했던 에코공원의 산책로를 떠올려, 마을을 원으로 이어, 홍수가 나더라도 안전하게 등하교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나의 프로젝트 디자인 콘셉트로 잡았고, 마지막 결과물로 제안한 디자인은 아이들이 휴대가 가능한 안전 브로셔였다.
그런데 과연 자연재해로 인한 홍수에만 우리가 대책이 필요할까?
내 정신에도 홍수가 난 적이 있다.
사실 어제도 그랬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함께 힘든 날.
그렇게 응급처치가 필요했던 날.
어제 나의 응급처치는 사진 2장으로 해결됐다.
내 마음을 저 멀리서도 읽은 걸까.
스페인에서 순례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인터넷이 잘 안 되는 환경에서도 나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보내온 사진들이다. 얼마나 고맙던지.
와우!
내 마음의 울컥거림이 잔잔함으로 바로 치료되는 기분이었다.
맞다. 나에게도 내가 홍수에 빠져있지 않고, 나에게 응급 대피소를 마련해 주는 이들이 내 주변에는 많이 있음을 또 한 번 깨닫는다.
누구나, 한 번쯤, 아니 여러 번, 자신이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는 느낌이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나 스스로나의 응급대비소를 찾아 올라와 나를 보호할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은 어떤 방향으로든 흐르고 있다.
방향을 알고 또 내 중심이 어디에 제대로 갈고리를 걸고 있는지 그 고리를 제대로 걸려 있는지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는 차디찬 영혼, 당나귀, 눈먼 자, 술 취한 자를 두고 담대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두려움을 아는 자, 그러면서도 그 두려움을 제어하는 자, 긍지를 갖고 심연을 바라보는 자만이 용기 있는 자다.
독수리의 눈으로 심연을 바라보는 자, 독수리의 발톱으로 심연을 잡고 있는 자, 그런 자가 용기 있는 자다. (중략) 양의 발톱으로 그러한 것들을 움켜잡아서는 안된다! - 니체 (주 1)
정신과 마음의 홍수.
내게도 내 전체를 휘청거리게 만드는 홍수를 너무 쓰나미가 온다.
하지만 나에게는 독수리의 눈과 발톱이 있다.
이는 분명 나의 기준에, 기본에,
그리고 나의 신념과 목표를 제대로 움켜잡고 있으리라.
이렇게만 된다면
어떤 쓰나미에서도 나는 방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마치, 우리의 아이들이 제 아무리 홍수라도 자신의 배움을 멈추지 않는 길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
(주 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